Spiritual Writing2(2004-2007)
교회 공동체의 기반
Povi-Enuh
2012. 3. 22. 06:54
교회 공동체의 기반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미움을 볼 때조차도 감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위에서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 헨리 나웬 -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달을 보며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나 언제나 저 위에 떠 있는 분처럼 느끼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 멀리 떠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계신 걸까요. 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우리 세상 속에 갖혀 있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에 계시기만 한 것일까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필시 벌써 그 길에서 내려와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함께 길을 걷는 수없이 많은 도반들로 인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거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존재로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의 시험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생몸살과도 같은 일들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성도들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성인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참 모습은 그런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여서 거룩의 위장술을 부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의식 차원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해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존재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성도聖徒가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아닌 존재들]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타인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데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하듯이, 아직-아닌 것을 지금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존재하는 ‘우리’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 안에 생명의 지탱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타인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의 시험장에서 다져진 마음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달빛만을 내려 보내는 하늘의 저 달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머무시지 않고 우리 위에서 은총을 단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가 머리 위로, 그리고 우리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은 손이라는 국부적 영역에 비할데 없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로써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인 것입니다. <2004.04.26>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미움을 볼 때조차도 감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위에서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 헨리 나웬 -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달을 보며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나 언제나 저 위에 떠 있는 분처럼 느끼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 멀리 떠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계신 걸까요. 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우리 세상 속에 갖혀 있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에 계시기만 한 것일까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필시 벌써 그 길에서 내려와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함께 길을 걷는 수없이 많은 도반들로 인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거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존재로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의 시험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생몸살과도 같은 일들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성도들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성인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참 모습은 그런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여서 거룩의 위장술을 부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의식 차원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해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존재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성도聖徒가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아닌 존재들]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타인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데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하듯이, 아직-아닌 것을 지금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존재하는 ‘우리’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 안에 생명의 지탱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타인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의 시험장에서 다져진 마음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달빛만을 내려 보내는 하늘의 저 달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머무시지 않고 우리 위에서 은총을 단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가 머리 위로, 그리고 우리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은 손이라는 국부적 영역에 비할데 없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로써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인 것입니다. <2004.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