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 Writing2(2004-2007)
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Povi-Enuh
2012. 3. 22. 06:52
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비어 있음은 잉태의 공간이고, 모든 창조는 이 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이 비어 있음의 공간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맞는다. 마치 심연이나 영원으로의 차가운 추락.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위험한 부정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둘러싸인 영역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웨인 멀러 -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마당에 나와 문득 뒷산을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하늘 곳곳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과 둥근 달,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진 조령산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산의 밤공기와 풍경은 시각을 맑게 정제해주고 교정해주며 그 곳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정도로 매력적인 비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산에 혼자 올라 보려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홀로 성큼 들어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인데 오르려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라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산에 올라 자칫 산짐승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 발을 헛디뎌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에 오르는 두려움이 분명 이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경험이 없다는 구차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용기를 내볼 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웠을때 느끼는 해방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자 하는 그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비움으로 가능한 것들을 헤아려 볼 수는 있어도 정작 비우지는 못합니다. 이는 늘 채우려고만 발버둥치는 우리 삶의 구조로 인함이며, 채움으로만 만족해 왔던 과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됨 속에 살며 그릇됨을 방편으로 삼아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한시적 기쁨과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한정적 만족감, 이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른 가능성에로의 열린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수학을 모두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수세계의 다양함을 보고 싶은 이들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신비속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막연한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막연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으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고자 내딛는 첫 발은 불편한 우리의 믿음이 공고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막연하다’는 것은 도리어 ‘가능성’이며,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4.04.21>
비어 있음은 잉태의 공간이고, 모든 창조는 이 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이 비어 있음의 공간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맞는다. 마치 심연이나 영원으로의 차가운 추락.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위험한 부정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둘러싸인 영역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웨인 멀러 -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마당에 나와 문득 뒷산을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하늘 곳곳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과 둥근 달,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진 조령산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산의 밤공기와 풍경은 시각을 맑게 정제해주고 교정해주며 그 곳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정도로 매력적인 비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산에 혼자 올라 보려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홀로 성큼 들어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인데 오르려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라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산에 올라 자칫 산짐승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 발을 헛디뎌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에 오르는 두려움이 분명 이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경험이 없다는 구차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용기를 내볼 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웠을때 느끼는 해방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자 하는 그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비움으로 가능한 것들을 헤아려 볼 수는 있어도 정작 비우지는 못합니다. 이는 늘 채우려고만 발버둥치는 우리 삶의 구조로 인함이며, 채움으로만 만족해 왔던 과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됨 속에 살며 그릇됨을 방편으로 삼아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한시적 기쁨과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한정적 만족감, 이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른 가능성에로의 열린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수학을 모두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수세계의 다양함을 보고 싶은 이들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신비속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막연한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막연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으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고자 내딛는 첫 발은 불편한 우리의 믿음이 공고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막연하다’는 것은 도리어 ‘가능성’이며,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