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vi-Enuh 2012. 3. 22. 06:50
지금과 거기

사실 우리가 죽은 ‘후’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공간상의 사후세계를 알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후세계를 알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부터 죽음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게 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죽기 ‘전’에 진정으로 살 것이냐이다. - 모리스 젱델 -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갔습니다. 이때껏 절이나 무당을 찾아 가서 불공을 드린 것이 유일한 종교적 문화 체험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나도 낯선 교회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교회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되면서, 즉 교회에 다니는 맛을 알게 되면서 방과 후에는 매일 교회에 나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 되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던 당시를 회상해보면, 너무 지나치리만큼 교회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곤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뜨거운 체험, 그 순간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입니다. 그 후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제일 행복했었기에 거리에 붙여있던 벽보를 보고 당시 인천에서 행해진 집회란 집회는 거의 죄다 참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성령체험을 하면서 곧바로 제 머리에 주입되었던 것이 [종말론]이었습니다.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고, 그것을 대비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대학 3학년이었던 1992년 10월26일,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다미선교회를 고교시절 미리 접했더라면 어쩌면 저도 거기에 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마만큼 학창시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전도에 열심을 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 3년 내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집회에 참석했던 것일 정도니까요. 당시 고교생이었던 저는 인천, 서울, 대전, 부산, 평택, 수원 등등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날이 곧 다가온다는 이 무시무시한 말을 무기로 삼아 귀찮게 굴지 말라며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던 부산의 어떤 뱃사람 앞에서도 그다지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가 생생합니다. 벌써 15년이 훨씬 지난 그 때이지만 그 때 제 가슴에 품었던 비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고교시절의 추억입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이 종말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여타의 다른 교리나 신학 장르 중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구원론 등등의 중요한 신학적 진술들과 더불어 읽혀질 때 비로서 종말론은 올바른 꼴로 신앙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교시절의 제 모습이 때론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론 부끄럽기도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당시 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행한 설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으면서도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만 골라서 편식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오시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종말이 지연되면서 의견이 분분하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내가 전에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각각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십시오”[살전4:11]라고 권면하면서,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바탕이요 으뜸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윗 글에서 모리스 젱델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오해할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생활이 훗날 우리가 기약하는 그 세상에서의 삶과 이질적이라면, 훗날의 기약은 도리어 현실 생활을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현실의 시/공과 공감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나누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 [이 자리에서] / [거기 있는 존재Da-Sein]로서 온당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꽃에서 우주를 보고, 모래알 속에서 영원을 보는 눈은 시인 블래이크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맛볼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심판과 구원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동일한 메시지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