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 Writing2(2004-2007)

현실을 그저 현실로

Povi-Enuh 2012. 3. 22. 15:19

현실을 그저 현실로

인간 예수는 실망으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실망에 대한 반응은 교훈적입니다.
그분은 결코 불평하지 않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의기소침해져서 일을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관계의 실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때로는 애정을 갖기도 하고 도와도 주지만
때로는 실망시키리라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비록 원한다 해도 사람들이 항상 이상적으로,
혹은 완벽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 랄프 라니에리 -


예수님처럼 영민하신 분이 또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가슴 따뜻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어리숙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결같은 자비와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무지와 옹색과 배신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로 인해서 마음 아파 하시면서 홀로 기도하셨던 모습이었지요.

예수님은 분명 마음이 여린 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속내를 다 드러내 보였던 분이기도 하고, 한번은 너무 어이없는 경우를 당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셨는지
주저 앉기도 하셨습니다. 언제 그랬냐구요? 마가복음 9장35절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네요. 한번 찾아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두 번째로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어서 가버나움 집 밖에서 그들은 서로 누가 제일 큰 제자인지를 놓고 쟁론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처음에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못들으셨나 봅니다. 아니 제자들을 오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3절에서 제자들에게
"토론‘[디아로기조마이]διαλογίξομαι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디아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
하였기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디아로기조마이]와 [디아레고마이]는 무슨 차이 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디아로기조마이]는 reflection, consider를 의미합니다. 즉 반성하고, 생각해보고, 곰곰이 따져 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다시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혹 반성하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놓고 반성하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디아레고마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speak out이나 confer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어떤 결론을 위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하는 이話者의 말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이
[자기 자신을 향해] 회개하고 반성하는 모습이기를 바랬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산에서의 무지한 모습,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던 무능한 모습, 그리고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무정물無情物과도 같은 모습을 뒤로하고서 누가 큰가 하는 것을 두고 쌈박질을 하는 무쇠낯짝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들은 직후에 벌어진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은 마치 돌아가시는 부모를 앞에 두고 상속 다툼을 벌이는 것에 버금갈만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제 곧 자신에게 닥칠 일로 인해 유언과도 같은 피빛 가르침으로 애쓰셨지만 제자들은 동상이몽으로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하릴없이 주저 앉으셨지만, 다시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나쁜 선생은 있어도 나쁜 제자는 없다”는 말을 주님이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주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προτος, 프로토스]가 되려면 끝[εσχατος, 에스카토스]이 되라고 천천히, 천천히 말씀하십니다.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다시금 친절히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자신을 좌절시키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이들까지도 품에 안아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현실로 그대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현실이 주는 피치 못할 좌절감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뜻 주시고 힘 주신 하나님의 길을 따라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모든 시간성을 아우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소유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으로
그 시간성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똑똑히 보셨던 주님은 송곳눈을 하고서 달려오는 현실의 굴레로부터 참 자유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2004.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