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나는 하나님의 창조계에 진화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몸을 빚으려고 바위에서 재료를 취하셨고, 신경조직을 뽑아내시려 꽃잎의 맥들을 본따셨다는 생각만 해도 흥겹다. 그러나 내게 넣어주실
본심을 생각하셨을 때 그 분든 당신 자신에게서 모델을 찾으셔야 했다. 성삼위 생명에서 본을 뜨셨다. 그래서 당신의 모습 따라, 당신과 비슷하게 나를 만드셨다. 마음이 통하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자식
을 만드시는 솜씨였다. 자식은 아버지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이다. 아버지의 자유를 이어받은 자유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통하는 마음이다. 그분의 계획은 끝이 나지 않았고, 그 분의 일손은 완성되지 않았다. 끝났다면 세상은 종국이 올 것이다.

끝나기까지 얼마나 간격이 남았는지는 우리 각자에게서 어림잡히는 간격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참된 탄생, 보이는 사물들의 좁다란 동굴을 빠져나가 
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날이 언제쯤일까? 그날 우리는 아들의 자격으로
그분의 집에 발을 들여 놓을 것이다. 벽을 장식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집에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한 그루 화분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아버지를 몰라보는 집짐승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 까를로 까레또 -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진화론자
찰스 다윈
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은 운집된 자연의 작동은 [우연적]이며, 그 행태는 [투쟁적]이라는 것을 밝혀낸 점일 것입니다. 당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정반대하는 모습처럼 보였고, 마치 수백년전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의 학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교회는 긴장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는지, 억지춘향으로라도 그를 묶어 두려는 의미없는 조바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스스로 놀라 고민하였지만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 출간된지 1년 후인 1860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놀라운 우주, 특히 인간의 본성을 보고 모든 것이 무자비한 힘의 결과라고 결론짓는 것에 아무래도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나
작동되는 세세하게 갖추어진 설계된 법칙들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 것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 책을 출간한 뒤로도 교구 목사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난 그 어떤 것’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과학에 대해 보여왔던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과학적 발견에 의해 삶이 변하고 세계관이 변화하고 있으나 그들의 세계관은 6.000년 지구 역사를 고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성과에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과학적 성과에 반응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가설적이며 한시적인 성과에 조급한 신학적 결론을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IT업계 근황의 단적인 예에서와 같이 현대의 우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빅뱅이론조차도 맹백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며 잠정적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듯이 과학적 발견은 그것에 동참하고, 면밀히 탐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성과 보고서를 접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세계관을 한시성에 묶어놓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신앙인들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햐여
존 호트John F. Haught
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빅뱅 이론이 신학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 중 하나는 최소한 그것이 우리의 종교 사상에서 다시 한 번 우주를 고려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집을 지어 주신 하나님의 창조 행동을 찬미하는 것은 세상의 급류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기계적 역학관계가 아니라 옥루玉淚를 주고 받는
자비의 역학
입니다. 그 역학은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으로 손수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기에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창조주를 힘껏 부를 수 있도록 이 마음의 창을 닦고 자비의 역학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창조의 때에 우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태초의 바람이 불어 우리 가슴을 시원케하고, 그 바람 맞아 파릇해진 마음으로 저 언덕 위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살찬 바람 맞으며 살아나가는 소조한 인생들일수록 이런 간절한 마음이 더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손수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상상만으로도 이처럼 가슴뛰고 행복할진데,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때는 말로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 자비의 역학을 품은 이들의 찬미는 자식의 노래이며,
그것을 흔들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 <2004.05.01>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안의 기쁨의 공간  (0) 2012.03.22
인간으로 존재하라  (0) 2012.03.22
소중한 일부터  (0) 2012.03.22
교회 공동체의 기반  (0) 2012.03.22
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0) 2012.03.22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