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 Writing2(2004-2007)'에 해당되는 글 4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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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그저 현실로
인간 예수는 실망으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실망에 대한 반응은 교훈적입니다.
그분은 결코 불평하지 않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의기소침해져서 일을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관계의 실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때로는 애정을 갖기도 하고 도와도 주지만
때로는 실망시키리라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비록 원한다 해도 사람들이 항상 이상적으로,
혹은 완벽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 랄프 라니에리 -
예수님처럼 영민하신 분이 또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가슴 따뜻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어리숙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결같은 자비와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무지와 옹색과 배신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로 인해서 마음 아파 하시면서 홀로 기도하셨던 모습이었지요.
예수님은 분명 마음이 여린 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속내를 다 드러내 보였던 분이기도 하고, 한번은 너무 어이없는 경우를 당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셨는지 주저 앉기도 하셨습니다. 언제 그랬냐구요? 마가복음 9장35절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네요. 한번 찾아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두 번째로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어서 가버나움 집 밖에서 그들은 서로 누가 제일 큰 제자인지를 놓고 쟁론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처음에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못들으셨나 봅니다. 아니 제자들을 오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3절에서 제자들에게 "토론‘[디아로기조마이]διαλογίξομαι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디아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하였기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디아로기조마이]와 [디아레고마이]는 무슨 차이 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디아로기조마이]는 reflection, consider를 의미합니다. 즉 반성하고, 생각해보고, 곰곰이 따져 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다시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혹 반성하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놓고 반성하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디아레고마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speak out이나 confer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어떤 결론을 위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하는 이話者의 말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이 [자기 자신을 향해] 회개하고 반성하는 모습이기를 바랬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산에서의 무지한 모습,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던 무능한 모습, 그리고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무정물無情物과도 같은 모습을 뒤로하고서 누가 큰가 하는 것을 두고 쌈박질을 하는 무쇠낯짝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들은 직후에 벌어진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은 마치 돌아가시는 부모를 앞에 두고 상속 다툼을 벌이는 것에 버금갈만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제 곧 자신에게 닥칠 일로 인해 유언과도 같은 피빛 가르침으로 애쓰셨지만 제자들은 동상이몽으로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하릴없이 주저 앉으셨지만, 다시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나쁜 선생은 있어도 나쁜 제자는 없다”는 말을 주님이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주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προτος, 프로토스]가 되려면 끝[εσχατος, 에스카토스]이 되라고 천천히, 천천히 말씀하십니다.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다시금 친절히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자신을 좌절시키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이들까지도 품에 안아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현실로 그대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현실이 주는 피치 못할 좌절감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뜻 주시고 힘 주신 하나님의 길을 따라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모든 시간성을 아우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소유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으로 그 시간성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똑똑히 보셨던 주님은 송곳눈을 하고서 달려오는 현실의 굴레로부터 참 자유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200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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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증명하는 삶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철없고 부질없는 모험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통상적으로 이런 물음으로 골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철저히 구조화된 세상속에서 신의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제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판에 신의 존재를 구상하여 세상 구조에 대조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거꾸로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신뢰하고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소중하고도 가치롭게 여기는 그 무엇은 과연 얼마나 실증적이며 얼마나 검증된 것인가고 말입니다. 이것은 네거티브적 질문을 통해 반사논리를 얻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코웃음을 받기에 딱좋은 격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가치들이 실증적이지 못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모호하다’거나 ‘확실하지 않다’거나 혹은 ‘미신적이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해주는 원인原因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기도 버겨운 삶은 현상 이면의 것들에 전혀 무감각해져서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모든 것이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라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고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감히 머리 둘 곳에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끄 모노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우연’에 따라 우발적으로 일아나는 현상이라면,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혈연을 비롯한 갖가지 관계성들이 단순히 우연적 발생이라면, 그 속에서 윤리를 꺼낼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르또 에코가 “타자의 존재성 자체에서 윤리가 나올 수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며 심증적인 주장일뿐 그에 따른 실증적인 논거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형제나 부모에게 욕을 하든 살인을 하든 원리 원칙적으로는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어겼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뿐이지 그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임의적이며 형식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권위를 찾기는 힘듭니다. 흔히 말하듯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은 단지 유희적 언어로, 상황이나 문장에 어울리는 조미료같은 언어로서 작용할 수는 있어도 언어의 진정성에서는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심각한 오류는 그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근거가 현실 생활에서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아기적 발달에서 정지된 인간 상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단지 경험적 근거에만 의지하여) ‘희망’이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거나, 가장 극단적인 예로는 그들이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신의 존재만큼이나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인간 가치일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적 주장이 앞선 경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을 갖는 것도 논리적 적합성을 따져서 신앙을 선택하기 보다는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논리적이며 이성적 비판은 그 다음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감정적으로 싫은 것에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하나 하나는 다방면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어로써 역할합니다. 이미 어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사유체계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신적인 언어로써 역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 존재는 굳이 얕은 머리로 증명해 낼 필요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비판하거나 변증한다는 것은 어느 쪽에서건 충분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언어가 되어야겠습니다. 커다란 사전 한 페이지에 장식되어, 밑줄 긋고 또 읽어볼만한 단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단어가 동사이건 명사이건 혹은 다른 것이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2004.05.13>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철없고 부질없는 모험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통상적으로 이런 물음으로 골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철저히 구조화된 세상속에서 신의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제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판에 신의 존재를 구상하여 세상 구조에 대조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거꾸로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신뢰하고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소중하고도 가치롭게 여기는 그 무엇은 과연 얼마나 실증적이며 얼마나 검증된 것인가고 말입니다. 이것은 네거티브적 질문을 통해 반사논리를 얻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코웃음을 받기에 딱좋은 격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가치들이 실증적이지 못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모호하다’거나 ‘확실하지 않다’거나 혹은 ‘미신적이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해주는 원인原因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기도 버겨운 삶은 현상 이면의 것들에 전혀 무감각해져서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모든 것이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라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고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감히 머리 둘 곳에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끄 모노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우연’에 따라 우발적으로 일아나는 현상이라면,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혈연을 비롯한 갖가지 관계성들이 단순히 우연적 발생이라면, 그 속에서 윤리를 꺼낼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르또 에코가 “타자의 존재성 자체에서 윤리가 나올 수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며 심증적인 주장일뿐 그에 따른 실증적인 논거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형제나 부모에게 욕을 하든 살인을 하든 원리 원칙적으로는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어겼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뿐이지 그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임의적이며 형식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권위를 찾기는 힘듭니다. 흔히 말하듯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은 단지 유희적 언어로, 상황이나 문장에 어울리는 조미료같은 언어로서 작용할 수는 있어도 언어의 진정성에서는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심각한 오류는 그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근거가 현실 생활에서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아기적 발달에서 정지된 인간 상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단지 경험적 근거에만 의지하여) ‘희망’이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거나, 가장 극단적인 예로는 그들이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신의 존재만큼이나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인간 가치일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적 주장이 앞선 경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을 갖는 것도 논리적 적합성을 따져서 신앙을 선택하기 보다는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논리적이며 이성적 비판은 그 다음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감정적으로 싫은 것에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하나 하나는 다방면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어로써 역할합니다. 이미 어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사유체계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신적인 언어로써 역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 존재는 굳이 얕은 머리로 증명해 낼 필요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비판하거나 변증한다는 것은 어느 쪽에서건 충분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언어가 되어야겠습니다. 커다란 사전 한 페이지에 장식되어, 밑줄 긋고 또 읽어볼만한 단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단어가 동사이건 명사이건 혹은 다른 것이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200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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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자식에게
천천히 씹어서
공손하게 삼켜라
봄에서 여름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비가 내렸다.
온 나라는 연록이 피어나며 생명의 기운이 뻗혀 난다.
►▷ 이 현 주 ◁◄
밥상 앞에서 투정부리는 것이 어디 우리 아이들만의 일일까요. 요사이 들어서 부쩍 투정이 느는 찬이와 건이를 보면서 오늘은 혼줄을 내주었습니다. 엄마가 정성스레 내준 밥상에 원하는 반찬이 없다는 이유였지요. 아이가 찾았던 반찬은 "콩나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콩나물을 유독 좋아했던 건이는 어딜가도 내주는 콩나물만큼은 남김없이 다 먹곤합니다만, 오늘 콩나물이 없다고 밥상 앞에서 딴짓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버럭 소리를 내면서 아니 지르면서, 일어나 나가 있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아이는 뜻밖의 제 호령에 울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예전에 김지하 선생은 "밥은 하늘이다"고 했지요. 학창시절 그분이 그 화두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핏 기억은 위에서 이현주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많이 다르지 않는 듯 합니다. 밥이 하늘이라면 우리는 하늘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 하늘은 이 땅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밥을 고맙게 먹지 못하고 그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거나 혹은 마지 못해 먹는 습관이 우리의 삶에 배어 있다면 하늘과 대지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다는 고마운 마음을 지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삼형제 중에 막내였던 저는 유독 밥투정을 했던 철부지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 제 입에 맞는 반찬을 내주시기도 하셨고, 그러면 두 형님들은 농 섞인 말로 "엄마는 막내만 좋아한다"고 말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우리 아이들이 저를 닮은 걸까요? 제 자화상을 보는 듯 건이와 찬이가 밥투정 부리는 것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이미 부모가 되버린 입장에서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늘나라를 둘레상에서부터 시작하셨던 예수님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 늦은 나이에 그것을 깨달은 저로써는 우리 가정에서 매일 나누는 밥상에서부터 하늘나라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밥상처럼 하늘나라를 맛볼 수 있는 시공時空이 또 있을까요. "~이 살아야 ~이 산다" 혹은 "~이 죽어야 ~가 산다"는 말이 유행이었지요? 그 유행에 동승해서 이런 말을 만들어 봅니다.
[밥상을 살려야 하늘나라가 산다]
이 말을 굳게 믿어봅니다. 제 밥상을 놓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나눌 길도 요원할 것이고, 나눌 길이 요원한 세상은, 드러낸 독아毒牙로 자신을 무는 꼴이 되기때문입니다. <2004.05.11>
천천히 씹어서
공손하게 삼켜라
봄에서 여름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비가 내렸다.
온 나라는 연록이 피어나며 생명의 기운이 뻗혀 난다.
►▷ 이 현 주 ◁◄
밥상 앞에서 투정부리는 것이 어디 우리 아이들만의 일일까요. 요사이 들어서 부쩍 투정이 느는 찬이와 건이를 보면서 오늘은 혼줄을 내주었습니다. 엄마가 정성스레 내준 밥상에 원하는 반찬이 없다는 이유였지요. 아이가 찾았던 반찬은 "콩나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콩나물을 유독 좋아했던 건이는 어딜가도 내주는 콩나물만큼은 남김없이 다 먹곤합니다만, 오늘 콩나물이 없다고 밥상 앞에서 딴짓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버럭 소리를 내면서 아니 지르면서, 일어나 나가 있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아이는 뜻밖의 제 호령에 울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예전에 김지하 선생은 "밥은 하늘이다"고 했지요. 학창시절 그분이 그 화두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핏 기억은 위에서 이현주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많이 다르지 않는 듯 합니다. 밥이 하늘이라면 우리는 하늘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 하늘은 이 땅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밥을 고맙게 먹지 못하고 그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거나 혹은 마지 못해 먹는 습관이 우리의 삶에 배어 있다면 하늘과 대지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다는 고마운 마음을 지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삼형제 중에 막내였던 저는 유독 밥투정을 했던 철부지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 제 입에 맞는 반찬을 내주시기도 하셨고, 그러면 두 형님들은 농 섞인 말로 "엄마는 막내만 좋아한다"고 말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우리 아이들이 저를 닮은 걸까요? 제 자화상을 보는 듯 건이와 찬이가 밥투정 부리는 것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이미 부모가 되버린 입장에서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늘나라를 둘레상에서부터 시작하셨던 예수님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 늦은 나이에 그것을 깨달은 저로써는 우리 가정에서 매일 나누는 밥상에서부터 하늘나라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밥상처럼 하늘나라를 맛볼 수 있는 시공時空이 또 있을까요. "~이 살아야 ~이 산다" 혹은 "~이 죽어야 ~가 산다"는 말이 유행이었지요? 그 유행에 동승해서 이런 말을 만들어 봅니다.
[밥상을 살려야 하늘나라가 산다]
이 말을 굳게 믿어봅니다. 제 밥상을 놓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나눌 길도 요원할 것이고, 나눌 길이 요원한 세상은, 드러낸 독아毒牙로 자신을 무는 꼴이 되기때문입니다. <200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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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는 맘의 나라다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하신 그 나라는 맘의 나라다. 안이란 맘이다. 맘의 나라는 없음의 나라다. 안內이란 모든 것이 다 아니否인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 가진 때가 맘이요, 그때가 왕이요, 그 맘이 온전히 왕 노릇하는 맘, 즉 제 노릇을 하는 맘이다. 무엇에 붙은 맘은 맘이 아니다. 맘이 제 노릇을 하면 그것이 평안이다. 불평은 맘대로 아니 되기 때문이요, 맘대로 아니 되는 것은 맘이 주장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주장하는 것이 있는 한, 맘 제대로는 못한다. 주장은 곧 잡힘이다. 당김이 곧 끌림이다. 맘대로는, 맘이 주장을 내버린 때에야 있다. 그것이 자유다. 무엇을 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하기 위해서이나 무엇을 하면 나는 잃어버린다. - 함석헌 -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인식론적 공간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정교한 말이나 논증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나라이며, 다가올 나라임과 동시에 이미 시작된 나라이기도 하기에, 인식론적 제한성으로 부여잡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가 어떤 묘령의 지역에 국한된 존재론적 공간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하나님 나라를 살다간 믿음의 선친들이 있어왔듯이, 하나님 나라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어느 곳이건 상관없이 펼쳐질 수 있는 흐르는 바람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였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의 집이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리고 어떤 이들은 억류된 채로 식구통으로 밀어 넣어주는 주먹밥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맘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마음’은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은 머리이며, 마음은 가슴입니다. 생각이 다르면 가슴을 나눌 수 없지만, 가슴을 열면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그것이 나누고 섬김에 있어서 어떤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가슴을 열면 누구도 친구가 될 수 있으며, 모든 것에 마음을 열고, 푸르러질 수 있는 이들은 찬송 가사처럼 그 어디나 하늘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애써 지키려 할때 지킬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버리려할 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에 비로소 완성될 나라이기에, 버리셨던 그 맘을 닮는 이들이야 말로 참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아직 아니긴 하지만, 우리가 이미 그 나라로 만날 수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200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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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기쁨의 공간
내 안에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들어 있다. 나 자신의 깊숙한 곳에는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종류의 이해와 인정보다 훨씬 강한 생명력과 삶에 대한 애착이 들어 있다. 기쁨은 표출되고 싶어하는 에너지이고, 밖으로부터 오는 방해 요소보다 강한 에너지이다. 폭포수가 아래로 흘러가면서 주변의 자갈을 비롯한 모든 잡동사니들을 씻어 내리고 바위를 닳게 하여 변형시키듯이, 기쁨은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모두 쓸어 내려서 삶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생동적인 에너지이다. 기쁨은 자신을 가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쁨은 모든 종류의 방해요소를 극복하고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고 만다. - 안셀름 그륀 -
한동안 마치 봄을 건너뛴 천덕꾸러기같은 여름 날씨였지만, 이제 비로소 본 궤도를 찾은 듯 햇살 아래 선 저의 모습이 봄기운으로 밝아집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뜨거운 햇살이나 혹은 매서운 칼바람은 난로 앞에 앉아 수박을 우걱거리거나 선풍기 바람을 쬐며 귤 껍질을 열여 제끼는 것처럼, 입에서는 단맛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웬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 몸 전체가 아닌 혀끝에서만 맴도는 과일 맛은 불구의 미각에 머무는 것처럼 완연한 사계절은 단지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서 나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 존재자들의 변화, 특별히 인간성의 회복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 현상이 순서가 뒤바뀌거나 엉킨채로 돌아가는 모습은 요사이 모든 장르에서 한창 유행인 퓨전fusion적 현상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이 급속도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음의 빈곤과 공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이 공허하면 우리의 행동도 공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공허해지면 그와 관계하는 이들도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인 사회, 그 사회들이 모인 국가와 세계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채로 공허한 것을 탐닉하고 만족하는 현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기쁨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마음이 기쁘다는 것은 자극적인 외부적 현상에 의해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셀름 그륀이 우리 안에 아무도 해치거나 침범할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있다 말했듯이, 그 공간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 기쁨은 무엇이며, 그 기쁨이 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삶이 가능할까요? 안셀름 그륀은 그것을 ‘폭포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파에 맞서 이겨낼 수 있는 참 기쁨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흐르는 물줄기처럼, 번잡스레 자리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거짓 기쁨을 몰아내고 거듭 위선적 기쁨을 심고자 막아서는 돌맹이들을 자연스런 에너지로 쓸어내려 저 폭포 아래에 내리쌓이게 하는 현상과도 같습니다.
누구나 하염없이 흘러내릴 기쁨의 폭포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이 아니면 참된 기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외적 현상이 만들어 주는 기쁨은 도리어 참 기쁨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겨울에 먹을 수 있는 수박은 혜택이요 진보라기 보다는 리듬을 깨는 어긋난 박자이며, 본 박자로 되돌아가야 하는 징조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표출할 수 있는 맛은 세치혀에 국한된 기쁨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어 온 몸에 주어지는 참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요 그 기쁨을 표출하고 전이시킬 대상일 것입니다. <2004.05.06>
내 안에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들어 있다. 나 자신의 깊숙한 곳에는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종류의 이해와 인정보다 훨씬 강한 생명력과 삶에 대한 애착이 들어 있다. 기쁨은 표출되고 싶어하는 에너지이고, 밖으로부터 오는 방해 요소보다 강한 에너지이다. 폭포수가 아래로 흘러가면서 주변의 자갈을 비롯한 모든 잡동사니들을 씻어 내리고 바위를 닳게 하여 변형시키듯이, 기쁨은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모두 쓸어 내려서 삶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생동적인 에너지이다. 기쁨은 자신을 가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쁨은 모든 종류의 방해요소를 극복하고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고 만다. - 안셀름 그륀 -
한동안 마치 봄을 건너뛴 천덕꾸러기같은 여름 날씨였지만, 이제 비로소 본 궤도를 찾은 듯 햇살 아래 선 저의 모습이 봄기운으로 밝아집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뜨거운 햇살이나 혹은 매서운 칼바람은 난로 앞에 앉아 수박을 우걱거리거나 선풍기 바람을 쬐며 귤 껍질을 열여 제끼는 것처럼, 입에서는 단맛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웬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 몸 전체가 아닌 혀끝에서만 맴도는 과일 맛은 불구의 미각에 머무는 것처럼 완연한 사계절은 단지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서 나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 존재자들의 변화, 특별히 인간성의 회복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 현상이 순서가 뒤바뀌거나 엉킨채로 돌아가는 모습은 요사이 모든 장르에서 한창 유행인 퓨전fusion적 현상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이 급속도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음의 빈곤과 공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이 공허하면 우리의 행동도 공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공허해지면 그와 관계하는 이들도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인 사회, 그 사회들이 모인 국가와 세계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채로 공허한 것을 탐닉하고 만족하는 현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기쁨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마음이 기쁘다는 것은 자극적인 외부적 현상에 의해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셀름 그륀이 우리 안에 아무도 해치거나 침범할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있다 말했듯이, 그 공간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 기쁨은 무엇이며, 그 기쁨이 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삶이 가능할까요? 안셀름 그륀은 그것을 ‘폭포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파에 맞서 이겨낼 수 있는 참 기쁨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흐르는 물줄기처럼, 번잡스레 자리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거짓 기쁨을 몰아내고 거듭 위선적 기쁨을 심고자 막아서는 돌맹이들을 자연스런 에너지로 쓸어내려 저 폭포 아래에 내리쌓이게 하는 현상과도 같습니다.
누구나 하염없이 흘러내릴 기쁨의 폭포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이 아니면 참된 기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외적 현상이 만들어 주는 기쁨은 도리어 참 기쁨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겨울에 먹을 수 있는 수박은 혜택이요 진보라기 보다는 리듬을 깨는 어긋난 박자이며, 본 박자로 되돌아가야 하는 징조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표출할 수 있는 맛은 세치혀에 국한된 기쁨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어 온 몸에 주어지는 참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요 그 기쁨을 표출하고 전이시킬 대상일 것입니다. <200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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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존재하라
우리의 존엄성은 우리의 뱃속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고 있는 구조물을 비판하고 부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우주에서 벗어나 높이 떠올라 저 창조적 존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을 방해하는 거짓 자아를 우리 자신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게 되면, 하나님도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에 우리의 자유가 숨쉬는 저 무한의 공간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 모리스 젱델 -
인간이 존엄한 가장 명백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긴하나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그분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니고서는 달리 어떻게 자신의 모습대로 지을 수 없어서 지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한사람 한사람 참 곱고도 귀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빚으시는 순간, 감격의 마음과 떨리는 손을 애써 가라앉히시며 정글디정근 사랑의 마음을 다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로써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어디 인간의 모습이 존엄하다고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울까요? 속임과 술수, 거짓과 교만, 그리고 살인을 넘어 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 끝을 다한 것인양, 드러낼 수 있는 극악한 행태를 모두다 꺼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신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시각각으로 급격해지고 있는 존엄성에의 도전은 종말을 예감토록 하곤 합니다.
어느 캄캄한 밤, 무섭도록 질주해 오는 죄책의 무게로 절망했던 적이 있습니까? 인생의 그릇된 판단과 실수로 인해서 자신을 학대하고 싶을 정도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범하는 악한 행동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의 판단, 나의 결정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래서 ‘나’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판단하고 결정했던 ‘나’라는 것은 온전한 ‘나’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 그 ‘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나’였을 것입니다. 아직 ‘나’조차도 잘 모르는 ‘나’가 행한 일들로 인해서 그저 상처받고 손놓고 비관하는 모습은 ‘거짓 나’에게 두 번 속아넘어가는 일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정당한 듯 보이도록 수런대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요, 훼손된 우리 자신을 방치하도록 꼬득이는 악한 존재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존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인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을 이동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간상의 포인트가 죄요 타락이요 절망이라면, 우리에게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리스 젱델의 말처럼 우리가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바울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을 모시는 성소聖所]가 되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초월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2004.05.03>
우리의 존엄성은 우리의 뱃속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고 있는 구조물을 비판하고 부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우주에서 벗어나 높이 떠올라 저 창조적 존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을 방해하는 거짓 자아를 우리 자신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게 되면, 하나님도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에 우리의 자유가 숨쉬는 저 무한의 공간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 모리스 젱델 -
인간이 존엄한 가장 명백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긴하나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그분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니고서는 달리 어떻게 자신의 모습대로 지을 수 없어서 지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한사람 한사람 참 곱고도 귀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빚으시는 순간, 감격의 마음과 떨리는 손을 애써 가라앉히시며 정글디정근 사랑의 마음을 다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로써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어디 인간의 모습이 존엄하다고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울까요? 속임과 술수, 거짓과 교만, 그리고 살인을 넘어 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 끝을 다한 것인양, 드러낼 수 있는 극악한 행태를 모두다 꺼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신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시각각으로 급격해지고 있는 존엄성에의 도전은 종말을 예감토록 하곤 합니다.
어느 캄캄한 밤, 무섭도록 질주해 오는 죄책의 무게로 절망했던 적이 있습니까? 인생의 그릇된 판단과 실수로 인해서 자신을 학대하고 싶을 정도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범하는 악한 행동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의 판단, 나의 결정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래서 ‘나’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판단하고 결정했던 ‘나’라는 것은 온전한 ‘나’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 그 ‘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나’였을 것입니다. 아직 ‘나’조차도 잘 모르는 ‘나’가 행한 일들로 인해서 그저 상처받고 손놓고 비관하는 모습은 ‘거짓 나’에게 두 번 속아넘어가는 일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정당한 듯 보이도록 수런대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요, 훼손된 우리 자신을 방치하도록 꼬득이는 악한 존재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존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인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을 이동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간상의 포인트가 죄요 타락이요 절망이라면, 우리에게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리스 젱델의 말처럼 우리가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바울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을 모시는 성소聖所]가 되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초월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200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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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나는 하나님의 창조계에 진화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몸을 빚으려고 바위에서 재료를 취하셨고, 신경조직을 뽑아내시려 꽃잎의 맥들을 본따셨다는 생각만 해도 흥겹다. 그러나 내게 넣어주실 본심을 생각하셨을 때 그 분든 당신 자신에게서 모델을 찾으셔야 했다. 성삼위 생명에서 본을 뜨셨다. 그래서 당신의 모습 따라, 당신과 비슷하게 나를 만드셨다. 마음이 통하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자식을 만드시는 솜씨였다. 자식은 아버지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이다. 아버지의 자유를 이어받은 자유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통하는 마음이다. 그분의 계획은 끝이 나지 않았고, 그 분의 일손은 완성되지 않았다. 끝났다면 세상은 종국이 올 것이다.
끝나기까지 얼마나 간격이 남았는지는 우리 각자에게서 어림잡히는 간격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참된 탄생, 보이는 사물들의 좁다란 동굴을 빠져나가 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날이 언제쯤일까? 그날 우리는 아들의 자격으로 그분의 집에 발을 들여 놓을 것이다. 벽을 장식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집에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한 그루 화분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아버지를 몰라보는 집짐승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 까를로 까레또 -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진화론자 찰스 다윈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은 운집된 자연의 작동은 [우연적]이며, 그 행태는 [투쟁적]이라는 것을 밝혀낸 점일 것입니다. 당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정반대하는 모습처럼 보였고, 마치 수백년전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의 학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교회는 긴장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는지, 억지춘향으로라도 그를 묶어 두려는 의미없는 조바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스스로 놀라 고민하였지만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 출간된지 1년 후인 1860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놀라운 우주, 특히 인간의 본성을 보고 모든 것이 무자비한 힘의 결과라고 결론짓는 것에 아무래도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나 작동되는 세세하게 갖추어진 설계된 법칙들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 것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 책을 출간한 뒤로도 교구 목사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난 그 어떤 것’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과학에 대해 보여왔던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과학적 발견에 의해 삶이 변하고 세계관이 변화하고 있으나 그들의 세계관은 6.000년 지구 역사를 고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성과에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과학적 성과에 반응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가설적이며 한시적인 성과에 조급한 신학적 결론을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IT업계 근황의 단적인 예에서와 같이 현대의 우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빅뱅이론조차도 맹백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며 잠정적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듯이 과학적 발견은 그것에 동참하고, 면밀히 탐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성과 보고서를 접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세계관을 한시성에 묶어놓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신앙인들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햐여 존 호트John F. Haught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빅뱅 이론이 신학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 중 하나는 최소한 그것이 우리의 종교 사상에서 다시 한 번 우주를 고려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집을 지어 주신 하나님의 창조 행동을 찬미하는 것은 세상의 급류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기계적 역학관계가 아니라 옥루玉淚를 주고 받는 자비의 역학입니다. 그 역학은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으로 손수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기에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창조주를 힘껏 부를 수 있도록 이 마음의 창을 닦고 자비의 역학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창조의 때에 우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태초의 바람이 불어 우리 가슴을 시원케하고, 그 바람 맞아 파릇해진 마음으로 저 언덕 위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살찬 바람 맞으며 살아나가는 소조한 인생들일수록 이런 간절한 마음이 더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손수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상상만으로도 이처럼 가슴뛰고 행복할진데,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때는 말로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 자비의 역학을 품은 이들의 찬미는 자식의 노래이며, 그것을 흔들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2004.05.01>
나는 하나님의 창조계에 진화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몸을 빚으려고 바위에서 재료를 취하셨고, 신경조직을 뽑아내시려 꽃잎의 맥들을 본따셨다는 생각만 해도 흥겹다. 그러나 내게 넣어주실 본심을 생각하셨을 때 그 분든 당신 자신에게서 모델을 찾으셔야 했다. 성삼위 생명에서 본을 뜨셨다. 그래서 당신의 모습 따라, 당신과 비슷하게 나를 만드셨다. 마음이 통하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자식을 만드시는 솜씨였다. 자식은 아버지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이다. 아버지의 자유를 이어받은 자유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통하는 마음이다. 그분의 계획은 끝이 나지 않았고, 그 분의 일손은 완성되지 않았다. 끝났다면 세상은 종국이 올 것이다.
끝나기까지 얼마나 간격이 남았는지는 우리 각자에게서 어림잡히는 간격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참된 탄생, 보이는 사물들의 좁다란 동굴을 빠져나가 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날이 언제쯤일까? 그날 우리는 아들의 자격으로 그분의 집에 발을 들여 놓을 것이다. 벽을 장식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집에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한 그루 화분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아버지를 몰라보는 집짐승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 까를로 까레또 -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진화론자 찰스 다윈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은 운집된 자연의 작동은 [우연적]이며, 그 행태는 [투쟁적]이라는 것을 밝혀낸 점일 것입니다. 당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정반대하는 모습처럼 보였고, 마치 수백년전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의 학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교회는 긴장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는지, 억지춘향으로라도 그를 묶어 두려는 의미없는 조바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스스로 놀라 고민하였지만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 출간된지 1년 후인 1860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놀라운 우주, 특히 인간의 본성을 보고 모든 것이 무자비한 힘의 결과라고 결론짓는 것에 아무래도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나 작동되는 세세하게 갖추어진 설계된 법칙들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 것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 책을 출간한 뒤로도 교구 목사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난 그 어떤 것’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과학에 대해 보여왔던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과학적 발견에 의해 삶이 변하고 세계관이 변화하고 있으나 그들의 세계관은 6.000년 지구 역사를 고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성과에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과학적 성과에 반응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가설적이며 한시적인 성과에 조급한 신학적 결론을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IT업계 근황의 단적인 예에서와 같이 현대의 우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빅뱅이론조차도 맹백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며 잠정적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듯이 과학적 발견은 그것에 동참하고, 면밀히 탐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성과 보고서를 접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세계관을 한시성에 묶어놓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신앙인들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햐여 존 호트John F. Haught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빅뱅 이론이 신학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 중 하나는 최소한 그것이 우리의 종교 사상에서 다시 한 번 우주를 고려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집을 지어 주신 하나님의 창조 행동을 찬미하는 것은 세상의 급류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기계적 역학관계가 아니라 옥루玉淚를 주고 받는 자비의 역학입니다. 그 역학은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으로 손수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기에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창조주를 힘껏 부를 수 있도록 이 마음의 창을 닦고 자비의 역학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창조의 때에 우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태초의 바람이 불어 우리 가슴을 시원케하고, 그 바람 맞아 파릇해진 마음으로 저 언덕 위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살찬 바람 맞으며 살아나가는 소조한 인생들일수록 이런 간절한 마음이 더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손수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상상만으로도 이처럼 가슴뛰고 행복할진데,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때는 말로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 자비의 역학을 품은 이들의 찬미는 자식의 노래이며, 그것을 흔들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200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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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일부터
빠르고 복잡해지는 생활 속에서 성공하는 시간관리의 핵심은 바쁜 일들을 우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덜 급하나 소중한 일부터 먼저 하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바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빠른 길은 방향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삶은 시간이기에 한정된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부터 먼저 하는 거겠지요. 여유가 생기면, 준비만 갖추면, 언젠가는, 하면서 자꾸 미루다간 영영 못하고 맙니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해가서 차츰 몸도 의지도 다 빛바래가고 맙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게 시간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쫓기고 망쳐지면서 돈과 여유를 아무리 추구해봐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고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내 한 생의 겉돌기를 멈추고 곧장 삶의 핵심으로 들어갈 순 없을까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그 일을 지금 이대로 바로 시작할 순 없을까요.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린 돈도 학벌도 신분도 조건도 다 제치고 오직 사람 하나 보고 맑은 눈빛 하나 보고 곧장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지요 참 맑고 뜨거웠지요. 우린 세상의 가장 낮고 그늘진 현장에서 기다림 하나 키우며 살기로 했지요. 그 약속 그 사랑으로 우리 여기까지 함께 와 있지요. - 박노해 -
오래 전 가르쳤던 제자가 결혼, 직업, 그리고 신앙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고, 그것은 결혼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말들이 생각이 났지만, 웬지 섣부른 말보다는 그의 말을 더 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얘기하는 것이 결혼할 상대의 조건을 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지금 그가 하는 일을 뒷받침 해줄만한 재력이 있는지,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등등을 총괄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사랑이란 건 별로 의미가 없어지고, 흔히들 말하듯이 정 때문에 살게되기 마련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귀에 박히도록 얘기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제가 과연 그런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을 스스로 안고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원론적인 얘기인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의 목적은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보아 성화聖化 혹은 신화神化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시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과정으로, 혹은 그런 도구로서 직업을 선택하고, 만날만한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도 그럴 때에 더 빛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목적을 두고 그것에 만족할만한 결혼 상대를 찾고, 일을 찾는다면 그 일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성공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결혼이나 직업은 단순히 자신의 욕구나 만족감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용돈’money for current use을 버는 것일 수 없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야구 선수는 야구를 하면서, 환경 미화원은 환경 미화를 하면서, 전업주부는 살림살이를 통해서, 그리고 본인은 학문을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말한 바 있듯이 저마다가 선택하고, 또 주어지는 직업이란 것을 ‘돈벌이’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로렌스 수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수도회에서 가장 영성이 깊은 사람은 자신도 아니요, 더 유명한 수도사도 아니며, 다름아닌 주방장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주방장은 자신이 하는 손놀림 속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릇을 닦는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오히려 오랜 기간의 기도보다 더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매순간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며, 성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직업이고, 그것이 결혼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박노해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 드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중한 일을 깨닫고 행할 수 있는 정도定道이며, 그 길을 걷는 이들은 그들에게 복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감격하는 나날이 될 것입니다. <2004.05.05>
빠르고 복잡해지는 생활 속에서 성공하는 시간관리의 핵심은 바쁜 일들을 우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덜 급하나 소중한 일부터 먼저 하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바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빠른 길은 방향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삶은 시간이기에 한정된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부터 먼저 하는 거겠지요. 여유가 생기면, 준비만 갖추면, 언젠가는, 하면서 자꾸 미루다간 영영 못하고 맙니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해가서 차츰 몸도 의지도 다 빛바래가고 맙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게 시간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쫓기고 망쳐지면서 돈과 여유를 아무리 추구해봐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고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내 한 생의 겉돌기를 멈추고 곧장 삶의 핵심으로 들어갈 순 없을까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그 일을 지금 이대로 바로 시작할 순 없을까요.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린 돈도 학벌도 신분도 조건도 다 제치고 오직 사람 하나 보고 맑은 눈빛 하나 보고 곧장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지요 참 맑고 뜨거웠지요. 우린 세상의 가장 낮고 그늘진 현장에서 기다림 하나 키우며 살기로 했지요. 그 약속 그 사랑으로 우리 여기까지 함께 와 있지요. - 박노해 -
오래 전 가르쳤던 제자가 결혼, 직업, 그리고 신앙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고, 그것은 결혼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말들이 생각이 났지만, 웬지 섣부른 말보다는 그의 말을 더 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얘기하는 것이 결혼할 상대의 조건을 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지금 그가 하는 일을 뒷받침 해줄만한 재력이 있는지,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등등을 총괄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사랑이란 건 별로 의미가 없어지고, 흔히들 말하듯이 정 때문에 살게되기 마련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귀에 박히도록 얘기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제가 과연 그런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을 스스로 안고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원론적인 얘기인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의 목적은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보아 성화聖化 혹은 신화神化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시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과정으로, 혹은 그런 도구로서 직업을 선택하고, 만날만한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도 그럴 때에 더 빛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목적을 두고 그것에 만족할만한 결혼 상대를 찾고, 일을 찾는다면 그 일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성공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결혼이나 직업은 단순히 자신의 욕구나 만족감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용돈’money for current use을 버는 것일 수 없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야구 선수는 야구를 하면서, 환경 미화원은 환경 미화를 하면서, 전업주부는 살림살이를 통해서, 그리고 본인은 학문을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말한 바 있듯이 저마다가 선택하고, 또 주어지는 직업이란 것을 ‘돈벌이’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로렌스 수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수도회에서 가장 영성이 깊은 사람은 자신도 아니요, 더 유명한 수도사도 아니며, 다름아닌 주방장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주방장은 자신이 하는 손놀림 속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릇을 닦는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오히려 오랜 기간의 기도보다 더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매순간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며, 성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직업이고, 그것이 결혼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박노해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 드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중한 일을 깨닫고 행할 수 있는 정도定道이며, 그 길을 걷는 이들은 그들에게 복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감격하는 나날이 될 것입니다. <200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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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의 기반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미움을 볼 때조차도 감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위에서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 헨리 나웬 -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달을 보며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나 언제나 저 위에 떠 있는 분처럼 느끼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 멀리 떠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계신 걸까요. 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우리 세상 속에 갖혀 있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에 계시기만 한 것일까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필시 벌써 그 길에서 내려와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함께 길을 걷는 수없이 많은 도반들로 인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거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존재로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의 시험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생몸살과도 같은 일들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성도들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성인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참 모습은 그런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여서 거룩의 위장술을 부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의식 차원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해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존재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성도聖徒가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아닌 존재들]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타인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데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하듯이, 아직-아닌 것을 지금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존재하는 ‘우리’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 안에 생명의 지탱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타인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의 시험장에서 다져진 마음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달빛만을 내려 보내는 하늘의 저 달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머무시지 않고 우리 위에서 은총을 단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가 머리 위로, 그리고 우리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은 손이라는 국부적 영역에 비할데 없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로써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인 것입니다. <2004.04.26>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미움을 볼 때조차도 감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위에서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 헨리 나웬 -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달을 보며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나 언제나 저 위에 떠 있는 분처럼 느끼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 멀리 떠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계신 걸까요. 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우리 세상 속에 갖혀 있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에 계시기만 한 것일까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필시 벌써 그 길에서 내려와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함께 길을 걷는 수없이 많은 도반들로 인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거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존재로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의 시험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생몸살과도 같은 일들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성도들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성인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참 모습은 그런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여서 거룩의 위장술을 부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의식 차원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해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존재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성도聖徒가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아닌 존재들]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타인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데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하듯이, 아직-아닌 것을 지금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존재하는 ‘우리’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 안에 생명의 지탱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타인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의 시험장에서 다져진 마음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달빛만을 내려 보내는 하늘의 저 달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머무시지 않고 우리 위에서 은총을 단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가 머리 위로, 그리고 우리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은 손이라는 국부적 영역에 비할데 없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로써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인 것입니다. <200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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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비어 있음은 잉태의 공간이고, 모든 창조는 이 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이 비어 있음의 공간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맞는다. 마치 심연이나 영원으로의 차가운 추락.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위험한 부정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둘러싸인 영역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웨인 멀러 -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마당에 나와 문득 뒷산을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하늘 곳곳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과 둥근 달,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진 조령산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산의 밤공기와 풍경은 시각을 맑게 정제해주고 교정해주며 그 곳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정도로 매력적인 비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산에 혼자 올라 보려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홀로 성큼 들어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인데 오르려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라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산에 올라 자칫 산짐승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 발을 헛디뎌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에 오르는 두려움이 분명 이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경험이 없다는 구차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용기를 내볼 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웠을때 느끼는 해방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자 하는 그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비움으로 가능한 것들을 헤아려 볼 수는 있어도 정작 비우지는 못합니다. 이는 늘 채우려고만 발버둥치는 우리 삶의 구조로 인함이며, 채움으로만 만족해 왔던 과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됨 속에 살며 그릇됨을 방편으로 삼아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한시적 기쁨과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한정적 만족감, 이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른 가능성에로의 열린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수학을 모두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수세계의 다양함을 보고 싶은 이들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신비속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막연한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막연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으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고자 내딛는 첫 발은 불편한 우리의 믿음이 공고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막연하다’는 것은 도리어 ‘가능성’이며,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4.04.21>
비어 있음은 잉태의 공간이고, 모든 창조는 이 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이 비어 있음의 공간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맞는다. 마치 심연이나 영원으로의 차가운 추락.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위험한 부정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둘러싸인 영역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웨인 멀러 -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마당에 나와 문득 뒷산을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하늘 곳곳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과 둥근 달,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진 조령산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산의 밤공기와 풍경은 시각을 맑게 정제해주고 교정해주며 그 곳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정도로 매력적인 비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산에 혼자 올라 보려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홀로 성큼 들어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인데 오르려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라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산에 올라 자칫 산짐승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 발을 헛디뎌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에 오르는 두려움이 분명 이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경험이 없다는 구차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용기를 내볼 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웠을때 느끼는 해방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자 하는 그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비움으로 가능한 것들을 헤아려 볼 수는 있어도 정작 비우지는 못합니다. 이는 늘 채우려고만 발버둥치는 우리 삶의 구조로 인함이며, 채움으로만 만족해 왔던 과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됨 속에 살며 그릇됨을 방편으로 삼아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한시적 기쁨과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한정적 만족감, 이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른 가능성에로의 열린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수학을 모두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수세계의 다양함을 보고 싶은 이들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신비속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막연한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막연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으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고자 내딛는 첫 발은 불편한 우리의 믿음이 공고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막연하다’는 것은 도리어 ‘가능성’이며,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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