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증명하는 삶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철없고 부질없는 모험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통상적으로 이런 물음으로 골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철저히 구조화된 세상속에서 신의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제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판에 신의 존재를 구상하여 세상 구조에 대조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거꾸로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신뢰하고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소중하고도 가치롭게 여기는 그 무엇은 과연 얼마나 실증적이며 얼마나 검증된 것인가고 말입니다. 이것은 네거티브적 질문을 통해 반사논리를 얻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코웃음을 받기에 딱좋은 격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가치들이 실증적이지 못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모호하다’거나 ‘확실하지 않다’거나 혹은 ‘미신적이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해주는 원인原因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기도 버겨운 삶은 현상 이면의 것들에 전혀 무감각해져서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모든 것이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라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고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감히 머리 둘 곳에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끄 모노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우연’에 따라 우발적으로 일아나는 현상이라면,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혈연을 비롯한 갖가지 관계성들이 단순히 우연적 발생이라면, 그 속에서 윤리를 꺼낼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르또 에코가 “타자의 존재성 자체에서 윤리가 나올 수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며 심증적인 주장일뿐 그에 따른 실증적인 논거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형제나 부모에게 욕을 하든 살인을 하든 원리 원칙적으로는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어겼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뿐이지 그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임의적이며 형식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권위를 찾기는 힘듭니다. 흔히 말하듯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은 단지 유희적 언어로, 상황이나 문장에 어울리는 조미료같은 언어로서 작용할 수는 있어도 언어의 진정성에서는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심각한 오류는 그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근거가 현실 생활에서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아기적 발달에서 정지된 인간 상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단지 경험적 근거에만 의지하여) ‘희망’이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거나, 가장 극단적인 예로는 그들이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신의 존재만큼이나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인간 가치일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적 주장이 앞선 경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을 갖는 것도 논리적 적합성을 따져서 신앙을 선택하기 보다는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논리적이며 이성적 비판은 그 다음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감정적으로 싫은 것에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하나 하나는 다방면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어로써 역할합니다. 이미 어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사유체계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신적인 언어로써 역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 존재는 굳이 얕은 머리로 증명해 낼 필요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비판하거나 변증한다는 것은 어느 쪽에서건 충분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언어가 되어야겠습니다. 커다란 사전 한 페이지에 장식되어, 밑줄 긋고 또 읽어볼만한 단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단어가 동사이건 명사이건 혹은 다른 것이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2004.05.13>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철없고 부질없는 모험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통상적으로 이런 물음으로 골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철저히 구조화된 세상속에서 신의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제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판에 신의 존재를 구상하여 세상 구조에 대조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거꾸로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신뢰하고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소중하고도 가치롭게 여기는 그 무엇은 과연 얼마나 실증적이며 얼마나 검증된 것인가고 말입니다. 이것은 네거티브적 질문을 통해 반사논리를 얻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코웃음을 받기에 딱좋은 격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가치들이 실증적이지 못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모호하다’거나 ‘확실하지 않다’거나 혹은 ‘미신적이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해주는 원인原因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기도 버겨운 삶은 현상 이면의 것들에 전혀 무감각해져서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모든 것이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라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고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감히 머리 둘 곳에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끄 모노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우연’에 따라 우발적으로 일아나는 현상이라면,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혈연을 비롯한 갖가지 관계성들이 단순히 우연적 발생이라면, 그 속에서 윤리를 꺼낼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르또 에코가 “타자의 존재성 자체에서 윤리가 나올 수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며 심증적인 주장일뿐 그에 따른 실증적인 논거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형제나 부모에게 욕을 하든 살인을 하든 원리 원칙적으로는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어겼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뿐이지 그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임의적이며 형식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권위를 찾기는 힘듭니다. 흔히 말하듯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은 단지 유희적 언어로, 상황이나 문장에 어울리는 조미료같은 언어로서 작용할 수는 있어도 언어의 진정성에서는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심각한 오류는 그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근거가 현실 생활에서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아기적 발달에서 정지된 인간 상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단지 경험적 근거에만 의지하여) ‘희망’이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거나, 가장 극단적인 예로는 그들이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신의 존재만큼이나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인간 가치일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적 주장이 앞선 경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을 갖는 것도 논리적 적합성을 따져서 신앙을 선택하기 보다는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논리적이며 이성적 비판은 그 다음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감정적으로 싫은 것에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하나 하나는 다방면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어로써 역할합니다. 이미 어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사유체계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신적인 언어로써 역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 존재는 굳이 얕은 머리로 증명해 낼 필요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비판하거나 변증한다는 것은 어느 쪽에서건 충분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언어가 되어야겠습니다. 커다란 사전 한 페이지에 장식되어, 밑줄 긋고 또 읽어볼만한 단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단어가 동사이건 명사이건 혹은 다른 것이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200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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