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 Writing2(2004-2007)'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2.03.21
  2. 2012.03.21
  3. 2012.03.21
  4. 2012.03.21
  5. 2012.03.21
  6. 2012.03.21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6
우리 경험


그러므로 자비심에서 나온 행적은 우리의 기쁨이 되며, 영생을 위해 먹는 그 양식들로 우리는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경비로 식사하고 배부르게 되는 것에 기뻐합시다. 우리가 헐벗은 이들에게 필요한 의복을 주어 그들이 입게 될 그 옷들에 대해서도 기뻐합시다. 마음이 관대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적게 바치지 않을 것이며, 자비나 동정심의 정도는 재물의 분량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론 부유한 이들이 더 많이 바치고 넉넉지 못한 이들은 적게 바치겠지만, 선행을 하는 이들의 사랑이 동일하다면 그 행위의 결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大 레오>


제레미 리프킨 의 지적처럼 인간이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안정’security을 추구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은 침범 받지 않는 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금을 긋고 담을 세워 안과 밖의 경계를 분명히 해 나감으로써 만족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사유 재산을 추동력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지금껏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담벼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히려 인류는 원치 않는 불안으로 떨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마음 놓고 뛰어 놀 공간 대신에 위험천만한 도로와 주차장이 생겨나고, 가족이 붕괴되고 사람 사이의 신뢰와 유대감이 사라지며, 사회 환경은 물론이고, 전지구적 환경이 파쇄되어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무쇠낯짝으로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를 몰아세운 이들은 득의양양하고 있지만 ‘나’를 버려 ‘우리’를 살리려했던 익명의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은 빈곤의 경계 초병으로 묶여있는 대한민국의 극단적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 언명은 대책 없는 책상물림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지금의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를 잊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공동체로서 존재하며, 이로써 ‘나’의 의미는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는 또한 경계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한 공동체로 품에 안을 수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는 무척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자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 아닌 계급간의 만남class encounter,
즉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구제해 주는 그런 만남의 사회를 원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회복되어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의 말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현재 지니고 있는 조건과 상황은 서로를 공격하고 끌어 내릴 무기가 아니라 서로간의 치유를 위한 요긴한 도구입니다.


무산계급이었던 예수께서 저 혼자 ‘올라 서’ 있는 삭개오를 ‘내려오라!’ 불러주시고, 그와 함께 평등한 공동 식탁에 앉아 다순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경청해주셨던 것은 계급간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간의 치유에 있어 주님은 우리를 프론티어로 세우십니다. 마음에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내고 제2의 삭개오를 부르러 가라 하십니다. 소유를 위해 달려왔던 억센 과거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살피고서
‘우리 경험’ 의 기쁨을 맛보라 부르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하라 하십니다.

■■■■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성경 말씀에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일이지만,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야고보서 2장1절,8-9절]
■■■■
<2004.03.04>
And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5
푸근한 마음 영민한 눈빛


친애하는 여러분, 호시탐탐 끊임없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원수를 무찌르는 데 열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것이 유익하지만, 매우 교활한 원수들이 아주 교묘한 미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지금에는 특히 더 정신을 차려 대비하고 있어야 하며,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합니다. <大 레오>


인도의 잠언에 보면 “악은 곧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지와 같이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악을 행한 그 자신을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수면위로 정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무탈한 것으로, 그리고 도리어 선함과 유익함의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특별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고 있는 오늘날,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열려진 여트마한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악한 기운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곤 합니다. 추운 겨울 날, 잠에 취한 사람은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이불 탓으로 돌려 뒤집어 쓰고 사지를 좁혀 계속 잠을 청하겠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이내 황소바람을 감지하고서 빈틈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틈이 좁은가 넓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의적 가장善意的 假裝 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인류의 수많은 크고 작은 약탈사에 있어서 단 한번이라도 선의적 가장을 쓰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합시다.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탈을 쓰고 행한 말로다 할 수 없는 악행들... 백인이 아닌 인종들, 여성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유태인들,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인들에 대한 침략과 학살에까지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내 욕심에 투영해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은 황소바람입니다. 大레오가 말한 ‘호시탐탐 노리는 원수’는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욕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보고서 살기등등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바리새인들처럼 ‘명분이 있고 가면을 썼으니 안심하라. 누가 뭐라 하랴!’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사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깊숙이 안착되어 있는 이러한 파편들이 얼마나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 돌이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곰삭은 마음이걸랑 갈아엎고umpflügen, 흐릿한 티끌눈을 하고 있걸랑 눈물로 흘려
푸근한 가슴 과 더불어 영민한 눈빛
으로 사순절을 살아야겠습니다.

■■■■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디모데전서 6장 5-6절]
■■■■
<2004.03.03>
And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4
인간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이들이 지니는 진정한 의로움은 자기가 감히 완전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인생 여정에서 자기 결심을 포기하고, 전진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릴 지경에 떨어지는 위험스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大 레오>

근대성을 넘어선 오늘의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폭압적인 행태로 드러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2차 세계 대전의 경우입니다.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집단적 자아 중심성에로의 선로에 올라선 뒤로 거침없이 몰아세운 그들의 향연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생명과 존엄을 앗아갔습니다.

어제 오늘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두개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와 2002년 개봉작이었던 [피아니스트] 였습니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교차되었던 책은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겪은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인간이 의미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의미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하나됨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불도저처럼 자기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앞뒤 가리지 않고 뛰는 모습도 불완전하여 자칫 낙마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삶이겠지만, 허송세월을 보낸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쉽게 좌절하는 모습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죽음과 절망의 상황.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도라의 남편이자 조수아의 아버지 귀도는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으로 당당한 유머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Spiel Mann, 연주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처럼 공포의 순간에서도 손가락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빅터 프랭클은 제 아무리 암암적벽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예술이 있고, 유머가 있고, 정치가 있고, 종교가 있을 수 있음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소중한 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생의 의미에 게으르고 무감했던 우리의 삶으로 인하여 회개하십시오. 大레오의 말처럼 그것은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것
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 가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데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15절]
■■■■

<2004.03.02>
And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
"금식에 관하여"


성스런 역사가 말해주듯이, 옛적에 히브리 백성과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들 때문에 블레셋인들의 가혹한 지배를 받고 있었을 때, 영혼과 육신의 힘을 회복하게 하는 단식을 함으로써 적군들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가혹하고 비참한 종살이가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먼저 악습들을 쳐 이기지 않고서는 무기를 들고 싸운들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과 음료를 절제하면서 자신들에게 참회의 엄한 벌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적들을 쳐 이기기 위해 먼저 목의 유혹을 그들 안에서 쳐 이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포악한 적군이며 가혹한 지배자들은
배부른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지배하고 있는 굶주린 히브리인들 앞에서 도망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大 레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말할 때가 있으면 침묵할 때가 있고, 함께 어울릴 때가 있으면 홀로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베른트 하인리히가 대부분의 곤충과 동물들은 동면冬眠이나 하면夏眠과 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먹이 부족에 적응하기 위한 비활동 기간을 겪는다고 말한 것처럼 먹을 때가 있으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사순절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먹지 않는 행위' 자체 보다 '먹지 못하는 마음'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금식 하는 것이 고행하는 것과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과 희락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히 금식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상가喪家의 상주의 마음처럼 먹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때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겸손을 생각하는 사순절에 하는 금식은 ‘먹지 않는 행위’에는 큰 의미가 없다하더라도 그 행위자의 마음 상태를 맑게 해주며, 이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금식하는 것이 자랑이나 그 어떠한 것 때문이 아니라 트미한 속사람에서 호연한 속사람으로의 과정을 보는 시간임과 동시에 먹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도록 허락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의 영광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세속에 머물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속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세속에 초연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도약을 위한 시간입니다.

■■■■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4절)
<2004.03.01>
And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
"자기를 이기는 것"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쳐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천상의 계명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또 우리 자신을 이기는 길 외에는 방도가 달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大 레오>

오랜만에 서울에 갈 때면, 제 얼굴에 먼지가 달라붙고 있다는 것을 촉감으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돌아와 세안을 하거나 하얀 옷에 검숭한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는데, 좋은 공기 마신다 소리 들으며 몇 년째 시골 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에는 그것이 촉감에 머물지 않고 혹여 살갗에 스며들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싸늘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예전엔 이런 경험 후에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면 이처럼 죄악에 무뎌진다"는 신앙적 의미를 말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큰 죄악이라면 나 자신이 그런 싸늘한 마음에 언제나 공조하고 있다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내가 몰고 다니는 차의 매연으로 인해 피조물이 압박감으로 신음하고 있는데도, 그런 점에는 도통 무감각했으면서도 단지 나만의 ‘청정 환경’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입니다. 일전에 이현주 목사님을 모시고 세미나를 할 때에 “차량 배기통이 차 안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인류의 크나 큰 죄악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신 것처럼, 역사 이래로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다양한 모습으로 수물거리면서 인간의 모든 부분들을 잠식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모든 것을 남 탓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세상의 악은 싹을 피웁니다. 나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서 소중한 가치를 쉬이 버리는 내 모습에서 세상의 악은 뿌리를 뻗습니다. 그런 내 모습에 망각의 필터를 고정시키고 섣부른 교훈으로 만족하는 내 모습에서 세상의 악은 열매를 맺습니다.

내 마음 닦기를 게을리 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맑은 마음에서 비롯됨을 깨닫습니다. 내 마음을 닦아 비우고, 오직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들어오시기를 오늘도 간구합니다. <2004.02.08>
And
십자가로 돌아가라!
Dietrich Bonhoeffer

1.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고난, 겸손, 모욕과 치욕으로 이끌기 전에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는 주님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인간의 범죄, 악 그리고 증오의 심연으로 내려가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도움받을 수 있는 높은 산으로 그들을 이끄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고 침뱉기 전에, 그분의 옷이 찢기고 피로 범벅이 되기 전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는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과도 같이 빛나고, 입고 있는 옷도 역시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게세마네에서 받는 예수님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이 제자들이 놀라운 축복인것과 같이 이제 변모된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하나님이신 그분을 보게된 것도 커다란 축복입니다. 이와 같이 그 제자들은 부활을 알고 있는(know) 상태에서 십자가에로 가게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우리와 몹시도 흡사합니다. 이러한 앎(Knowledge)은 분명 우리가 십자가를 견디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2.
모세와 엘리야가 변모된 예수님 옆에 서 있다는 것, 즉 이것은 율법과 예언이 그분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합니다. 누가는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의 출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Luke 9,31 ;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NIV, 역자주).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에 대해서 되풀이해서 증언하면서 그것이 여기서 진리요 현실이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즉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그 변모의 빛 가운데서 만나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이제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끝난 것입니다.

3.
비록 그 제자들이 이 끝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게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잡으려하고, 그것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변모의 세상 속에 머물러있기를 원하고, 더 이상 세상의 죽음의 현실에 돌아오길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영광과 능력의 세상에, 즉 눈에 보이도록 약속이 성취된 세상 속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있기를 원하지, 더 이상 그들이 믿는 것을 볼 수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 듣고 있는 우리 자신의 반응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더 이상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게 부활한 분으로서의 예수님, 빛나고 변모된 예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시적 능력과 영광을 원하며, 더 이상 십자가로 돌아가거나, 외형을 보지 않고 믿는다거나, 신앙으로 인해 고난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로 집을 짓게 하옵소서”

4.
제자들에게 이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현존의 빛나는 구름속에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말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은 그 말을 듣고 그에게 복종하려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광을 보여줍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삶 에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가시적인 그분의 영광을 즐기거나 머물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변모된 예수님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누구나 곧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인간이신 그분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을 듣고 그에게 복종해야만 합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2003.04.16 / 임태일 옮김>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