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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1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6
사순절 때의 의미
현세생활을 아무리 순결하고 절도있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세상살이에서 오는 먼지가 끼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혼의 광채가 어떠한 허무의 연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떠한 더러움에도 흐려지지 않고 끊임없이 닦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매우 조심하며 사는 영혼들에게도 이 시기가 필요하다면, 거의 일년 내내 태평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요긴하겠습니까? <大 레오>
사순절 기간이 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절연한 결심으로 이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것은 평소 부족했던 모습을 이 기간만이라도 특별한 연습과 훈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마다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선언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빠스카의 축일(Pasca, 부활절)에 받을 세례를 준비하면서 사순절을 보낸 것과 동일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과거의 우리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아무리 기억하기 싫고, 못나보이는 우리 자신의 과거라 할지라도 단 40일 동안의 특훈을 통해서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40일 이후의 더 큰 시련의 후폭풍으로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이 우리에게 카이로스kairos적인 시간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 기간이 과거의 모습을 정화 하는 특별한 훈련 시간임과 동시에 또한 미래 라는 풀코스 마라톤을 위한 출발 신호 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40일의 때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신 날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머무신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듯이 이 40일 동안의 비틀걸음으로 만족하려는 마음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순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살뜰히 교차하는 때입니다. 앞으로 비금차게 뛰기 위하여 잠시 물러서는 때입니다. 이러하기에 사순절은 참으로 요긴하게 주어진 은총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때의 모든 것이 부활의 새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 줍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 줍니다.
[디도서 2장 12-13절]
■■■■
<2004.03.16>
사순절 때의 의미
현세생활을 아무리 순결하고 절도있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세상살이에서 오는 먼지가 끼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혼의 광채가 어떠한 허무의 연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떠한 더러움에도 흐려지지 않고 끊임없이 닦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매우 조심하며 사는 영혼들에게도 이 시기가 필요하다면, 거의 일년 내내 태평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요긴하겠습니까? <大 레오>
사순절 기간이 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절연한 결심으로 이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것은 평소 부족했던 모습을 이 기간만이라도 특별한 연습과 훈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마다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선언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빠스카의 축일(Pasca, 부활절)에 받을 세례를 준비하면서 사순절을 보낸 것과 동일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과거의 우리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아무리 기억하기 싫고, 못나보이는 우리 자신의 과거라 할지라도 단 40일 동안의 특훈을 통해서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40일 이후의 더 큰 시련의 후폭풍으로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이 우리에게 카이로스kairos적인 시간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 기간이 과거의 모습을 정화 하는 특별한 훈련 시간임과 동시에 또한 미래 라는 풀코스 마라톤을 위한 출발 신호 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40일의 때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신 날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머무신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듯이 이 40일 동안의 비틀걸음으로 만족하려는 마음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순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살뜰히 교차하는 때입니다. 앞으로 비금차게 뛰기 위하여 잠시 물러서는 때입니다. 이러하기에 사순절은 참으로 요긴하게 주어진 은총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때의 모든 것이 부활의 새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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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 줍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 줍니다.
[디도서 2장 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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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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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5
하나님의 자비를 닮으십시오
친애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런 일들(자비의 행위)을 자발적으로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덕행의 적대자인 마귀가 이를 질투한 나머지 사악함의 무기로 무장하여 여러분의 자선 행위에다 자비심 자체에서 끌어낸 올가미들을 놓고,불신앙의 무기로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람들은 공명심公明心 의 무기로 굴복시키려 애쓴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 교만의 악은 선한 행위들에 가까이 있으며, 자만은 항상 덕행들을 시기합니다. <大 레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는 그 일이 무슨 일이든지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 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행하는 일에는 열매도 적을뿐더러, 행하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좋지 못한 기운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자발적’이라는 것은 때때로 ‘즉흥적’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은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지만, 그것이 ‘즉흥성’에 빠져 인내심을 잃고, 단발로 끝나고 만다면 ‘억지로’ 행할때보다도 더욱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 이웃과의 나눔에 있어 그것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캠페인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도움을 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중단’ 이라는 경험은 차라리 시작한 것만도 못한 심각한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행하는 우리의 모든 선의적 행위는 기쁜 마음이고도 준비된 마음 이어야겠습니다. 타인을 돕고 타인에게 배려한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적인 동정이나 연민은 그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지속적인 자비심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준비된 영성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무슨 일이든 초발심 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아무리 선하고 좋은 뜻으로 행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처음 가졌던 마음이 바래고 조악한 마음이 들어온다면, 그 일이 선하면 선할수록, 좋은 뜻이면 좋은 뜻일수록 오히려 더 불행하고 악해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사후소繪事後素가 중요합니다. 밑바탕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는 그림은 본래 가졌던 사물에의 인상이 채 구현되기도 전에 화려하고 현란한 채색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 이내 어그러질 것입니다. 교만은 겸손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순간, 초발심은 무너지고 얄망스런 달콤함에 취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심을 닮도록 그분을 지속적으로 만나십시오. 자비심은 하나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그분의 속성이자 본능이듯, 우리의 척박한 마음 밭을 갈아 자비의 샘을 터뜨려 마음의 심연에서부터 자연스레 흘러나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누가복음 6장 33-36절]
■■■■
<200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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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4
사악한 주장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불의한 자들의 모욕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현세 사물들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생각을 돌려보면, 얼마나 큰 어둠이 자기를 엄습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오류들이 사악한 주장들에서 생겨나고 있는지,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대립이 결국 한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우리의 원의대로 진척되지 않고, 인간의 그릇된 판단 때문에 사악한 자의 주장이 의로운 사람의 주장을 완전히 압도하는 것을 보게 되면, 관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흔들리게 되고, 부당한 트집을 잡는 불평에 떨어지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 세상 어디서나 또 어느 때나 현존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대로, “주님의 모든 길은 자비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大 레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신음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들의 피를 뽑아냈던 장본인들과 변절한 민주화 세력의 썩은 열매들이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을 현실로 끌어냈습니다. 가슴이 떨려 아픈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친노/반노의 구분으로 말하려 하지만 이것은 역사/반역사, 민주/반민주의 문제입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 아실겁니다. 누가 탄핵의 대상이며 누가 울어야하는지를 더 이상 말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더더욱 주님의 자비와 진리를 구할 때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볼 때입니다. 진리는 세상이 썩어 문드러질때 더 화사하게 피어남을 믿어야하겠습니다.
오히려 기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을 때입니다. 이제껏 수수방관하였으나 이제 옥석을 구분할 때입니다. 썩은 녹림綠林을 해산시키고, 녹녹한 봄을 맞아야겠습니다. 어느 때라도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늘 다시금 간구합니다.
■■■■
여호와의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25:4]
■■■■
<200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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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3
가장된 선의의 위험성
어떤 실체도 절대 악한 것은 아니며, 악 자체는 아무 본성도 될 수 없습니다. 선하신 창조주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으며,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우주 만물의 창조주는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곳에서 인간에게 음식과 음료로 제공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그 갖가지 종류의 성질에 있어서도 모두 거룩하며 깨끗합니다. 만일 욕심을 내어 무절제하게 먹는다 하더라도, 먹고 마시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지나침이지 음식이나 음료의 본성이 그들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大 레오>
성서의 예수님은 언제나 ‘먹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그도 그러셨을 것은 예수님은 늘 이쪽에서 저쪽으로 여행을 다니는 분이셨기에 육체적으로 피로하신 그분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시간은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기쁨과 감사의 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행과 더불어 ‘말하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회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배에서, 그리고 산에서 어디서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셨으며, 사람들‘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특별히 경구aphorism나 비유parable를 통해서 명쾌히 풀어내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나, 유독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 족족 반대하고 그를 죽이려는 음모도 서슴치 않았는데, 음식과 관련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겨하는 자’(눅7:34)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먹보요 술꾼’ (새번역성경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천륜을 거스린 패역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붙여서 그들을 길가에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율법적 근거가 있었습니다(신21:18-21). 그것은 언제 어느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눈의 가시를 잘라버기기 위한 수순을 천천히 밝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울 좋게도 ‘고르반’(막7:11)이라 하면서 부모를 내팽개치는 장본인은 정작 자신들이었으면서도 비난의 화살은 예수님에게로만 향했습니다. 예수님을 눈의 가시로 보던 사람들에게는 그가 먹고 마시는 것만 보았지,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교양없이 폭식을 하고, 술을 즐긴다는 유희적 현상몰이만 할 줄 알았지, 나눔과 치유의 참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둘레상에 기대어 앉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이 선포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에 자기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大 레오도 어거스틴 도 악은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악은 ‘인간 의지의 왜곡’이라 하는 것이 이 두 사람의 결론입니다.
좀 더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자면, “의지의 왜곡이라 함은 그 의지가 최고 실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 안에 깊이 놓여 있는 보배를 버리고 낮은 부분으로 떨어져 밖으로 부풀어 있는 것“입니다. 의지를 왜곡하는 이들은 쉽사리 법 위에, 하나님 위에 올라섭니다. 올라서려 내딛는 첫 걸음에서 의지의 왜곡이 가동되며, 완전히 올라선 이들은 부양浮揚된 마음으로 위험한 곡예를 벌이기 마련입니다. ‘선한 창조’의 본질을 너무나도 쉽게 외면하는 이들은 ‘현상’에 대한 자신들의 왜곡된 해석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번도 악의적 깃발아래서 자행된 적은 없었으나 그들이 들고 있는 ‘가장된 선의 깃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꺼풀을 벗겨낼 수 있는 깨어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손에 붙잡히셨고, ‘먹보요 술꾼’이라는 탄핵 발의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우리에게로 면면히 이어져 새로운 승리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2004년 3월 12일의 대한민국을 역사가 정당히 평가할 것을 믿으며]
■■■■
너희는 세례 요한이 와서 빵도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하고 마시기도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
[누가복음 7장 33-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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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2>
가장된 선의의 위험성
어떤 실체도 절대 악한 것은 아니며, 악 자체는 아무 본성도 될 수 없습니다. 선하신 창조주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으며,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우주 만물의 창조주는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곳에서 인간에게 음식과 음료로 제공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그 갖가지 종류의 성질에 있어서도 모두 거룩하며 깨끗합니다. 만일 욕심을 내어 무절제하게 먹는다 하더라도, 먹고 마시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지나침이지 음식이나 음료의 본성이 그들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大 레오>
성서의 예수님은 언제나 ‘먹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그도 그러셨을 것은 예수님은 늘 이쪽에서 저쪽으로 여행을 다니는 분이셨기에 육체적으로 피로하신 그분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시간은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기쁨과 감사의 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행과 더불어 ‘말하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회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배에서, 그리고 산에서 어디서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셨으며, 사람들‘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특별히 경구aphorism나 비유parable를 통해서 명쾌히 풀어내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나, 유독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 족족 반대하고 그를 죽이려는 음모도 서슴치 않았는데, 음식과 관련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겨하는 자’(눅7:34)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먹보요 술꾼’ (새번역성경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천륜을 거스린 패역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붙여서 그들을 길가에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율법적 근거가 있었습니다(신21:18-21). 그것은 언제 어느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눈의 가시를 잘라버기기 위한 수순을 천천히 밝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울 좋게도 ‘고르반’(막7:11)이라 하면서 부모를 내팽개치는 장본인은 정작 자신들이었으면서도 비난의 화살은 예수님에게로만 향했습니다. 예수님을 눈의 가시로 보던 사람들에게는 그가 먹고 마시는 것만 보았지,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교양없이 폭식을 하고, 술을 즐긴다는 유희적 현상몰이만 할 줄 알았지, 나눔과 치유의 참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둘레상에 기대어 앉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이 선포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에 자기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大 레오도 어거스틴 도 악은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악은 ‘인간 의지의 왜곡’이라 하는 것이 이 두 사람의 결론입니다.
좀 더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자면, “의지의 왜곡이라 함은 그 의지가 최고 실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 안에 깊이 놓여 있는 보배를 버리고 낮은 부분으로 떨어져 밖으로 부풀어 있는 것“입니다. 의지를 왜곡하는 이들은 쉽사리 법 위에, 하나님 위에 올라섭니다. 올라서려 내딛는 첫 걸음에서 의지의 왜곡이 가동되며, 완전히 올라선 이들은 부양浮揚된 마음으로 위험한 곡예를 벌이기 마련입니다. ‘선한 창조’의 본질을 너무나도 쉽게 외면하는 이들은 ‘현상’에 대한 자신들의 왜곡된 해석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번도 악의적 깃발아래서 자행된 적은 없었으나 그들이 들고 있는 ‘가장된 선의 깃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꺼풀을 벗겨낼 수 있는 깨어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손에 붙잡히셨고, ‘먹보요 술꾼’이라는 탄핵 발의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우리에게로 면면히 이어져 새로운 승리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2004년 3월 12일의 대한민국을 역사가 정당히 평가할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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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례 요한이 와서 빵도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하고 마시기도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
[누가복음 7장 33-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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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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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2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정돈되지 않은 부분이나 불결한 부분이 없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우리의 내적 구조물은 그것을 만드신 분의 도움 없이 유지할 수 없고, 그것을 세우신 분의 보호가 먼저 있지 않고서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성적인 돌들이며 살아 있는 재료들 이기 때문에, 창조주께서 당신 손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과 같이
복구되어야 할 우리도 우리를 만드신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大 레오>
“한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한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오기전까지는 너무나도 요원한 나라였으나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 주신 그분으로 인하여 그 나라의 신비는 무지했던 많은 이들에게 선연히 드러났습니다. 성서의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찾아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그리워했고, 사람을 사랑했으며,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당신 자신도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황홀하게 맛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하지 않는 그분을 상상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은 사람 사이에 계심으로 그가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그러운 눈빛 하나로 많은 이들의 아픔과 삶을 읽으신 그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삶의 의지속에서 발현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파스칼 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성보다 의지를 다스리기를 원하신다”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명석한 생각을 우리에게 뽐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 의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조율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나를 그리워하면서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생에 가장 가치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大 레오는 인간을 ‘이성적인 돌’이며 ‘살아 있는 재료’라 했습니다. ‘이성적인 돌’ 이란 건축자의 구상과 계획을 알고, 그의 손위에 올라 서도록 ‘준비하는 돌’ 이란 말로 읽혀집니다. ‘살아 있는 재료’ 란 집터에 들어와 사는 이들을 해하지 않고, 늘 신선하고도 맑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도록 자정自淨하는 안으로 밖으로 ‘천리향인 존재’ 라고 읽혀집니다. 건축자의 탁월한 선택, 그리고 그와 더불어 눈빛과 가슴빛으로 교감하는 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입니다.
■■■■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베드로전서 2장3-5절]
■■■■
<2004.03.11>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정돈되지 않은 부분이나 불결한 부분이 없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우리의 내적 구조물은 그것을 만드신 분의 도움 없이 유지할 수 없고, 그것을 세우신 분의 보호가 먼저 있지 않고서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성적인 돌들이며 살아 있는 재료들 이기 때문에, 창조주께서 당신 손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과 같이
복구되어야 할 우리도 우리를 만드신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大 레오>
“한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한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오기전까지는 너무나도 요원한 나라였으나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 주신 그분으로 인하여 그 나라의 신비는 무지했던 많은 이들에게 선연히 드러났습니다. 성서의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찾아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그리워했고, 사람을 사랑했으며,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당신 자신도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황홀하게 맛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하지 않는 그분을 상상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은 사람 사이에 계심으로 그가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그러운 눈빛 하나로 많은 이들의 아픔과 삶을 읽으신 그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삶의 의지속에서 발현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파스칼 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성보다 의지를 다스리기를 원하신다”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명석한 생각을 우리에게 뽐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 의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조율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나를 그리워하면서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생에 가장 가치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大 레오는 인간을 ‘이성적인 돌’이며 ‘살아 있는 재료’라 했습니다. ‘이성적인 돌’ 이란 건축자의 구상과 계획을 알고, 그의 손위에 올라 서도록 ‘준비하는 돌’ 이란 말로 읽혀집니다. ‘살아 있는 재료’ 란 집터에 들어와 사는 이들을 해하지 않고, 늘 신선하고도 맑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도록 자정自淨하는 안으로 밖으로 ‘천리향인 존재’ 라고 읽혀집니다. 건축자의 탁월한 선택, 그리고 그와 더불어 눈빛과 가슴빛으로 교감하는 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입니다.
■■■■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베드로전서 2장3-5절]
■■■■
<200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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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1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해 보십시오
영혼의 순결과 마음의 거울을 가리는 모든 것을 주의깊게 벗겨 내야 하며, 그 광채를 되찾기 위해서 더 깨끗해져야 합니다. 각자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엄한 심판대에서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문해 보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의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는지, 자기 안에 어떤 육적 원욕이 영적 원의를 거슬러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천한 것을 경멸하고 높은 지위를 탐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정한 이득을 얻고서 즐거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산을 과도하게 늘리고서 기뻐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의 행복에 시기심을 불태우거나 다른 이의 불행을 좋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大 레오>
폭설로 며칠동안 바깥 출입을 못하던 차에 오랜만에 대형할인 매장에 갔습니다. 아내가 미리 적어두었던 목록대로 물건을 사고 아이들과 함께 계산대로 가던 길에 장난감 코너가 눈에 들어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새라 아이들은 바쁜 걸음으로 그리로 향합니다. 한참을 둘러보며 이것 저것 만지는데, 둘째 찬이가 사달라고 졸라대는 장난감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렇게 써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을 물리치는 *** 레인저”
찬이는 얼마전 TV에서 한창 방영되었던 ‘파워포스 레인저’라는 프로그램 탓에 색깔이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가면을 쓰고 있는 캐릭터는 죄다 동일시의 대상어서 앞으로 양주먹을 차레로 내지르며 이내 구매욕을 터뜨리곤 합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얼러보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여 겨우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을 내려 놓게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상자 겉에 써있던 케치 프레이즈가 마음에 걸립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 미래 전사에 걸맞는 맞상대를 설정하려다 보니 외계인이었을 것이고, 지구를 지킨다는 준법적인 명분을 찾다보니 ‘환경파괴’라는 화두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문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환경 파괴의 주범을 외계인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려는 장사속이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속된 습성이 뭍어 있는 것는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을거라 했나요. 무릉도원에 사람 손이 닿으면 한달도 채못가 더 이상 이름값을 하지 못할 것이라지요. 지구 자원 남용과 환경파괴 최대의 주범인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도 모자라 화성에서 약탈해 올 천연가스로 떼돈을 벌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지요. 그 뉴스를 보았을때는 정말이지, 화성에 외계인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만약 화성인이 그 별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그네들은 그들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그랬듯이 가만놔두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런데 지금껏 인간의 상상력은 외계인이 침략해 온다 하였습니다. 정작 우리들이 책임져야할 죄악된 모습을 외계인에게 둘러 씌우고, 마치 우리들이 피해자인양 의로운 사람인양 장난감에도 새겨 놓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신성한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린다.“ [오렘 리온스 / 인디언 오논다가 족]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면의 평화가 있다하면서도 다른 존재자의 신음에 무감각한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닙니다. 나의 책임이며 나의 죄인 것을 타인이게 전과시키는 모습이라면 그 순간 그리스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책임조차도 당신 것인양 지고 가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 마음의 기쁨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이어든, 그 기쁨은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이며, 풀잎소리에, 풀잎바람에 귀를 대고 우주를 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일 것입니다.
■■■■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도 같은 짓을 하면서 남이 그런 짓을 한다고 심판하는 자가 있는데,
그런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것 같습니까?
[로마서 2장 1-3절]
■■■■
<2004.03.10>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해 보십시오
영혼의 순결과 마음의 거울을 가리는 모든 것을 주의깊게 벗겨 내야 하며, 그 광채를 되찾기 위해서 더 깨끗해져야 합니다. 각자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엄한 심판대에서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문해 보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의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는지, 자기 안에 어떤 육적 원욕이 영적 원의를 거슬러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천한 것을 경멸하고 높은 지위를 탐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정한 이득을 얻고서 즐거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산을 과도하게 늘리고서 기뻐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의 행복에 시기심을 불태우거나 다른 이의 불행을 좋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大 레오>
폭설로 며칠동안 바깥 출입을 못하던 차에 오랜만에 대형할인 매장에 갔습니다. 아내가 미리 적어두었던 목록대로 물건을 사고 아이들과 함께 계산대로 가던 길에 장난감 코너가 눈에 들어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새라 아이들은 바쁜 걸음으로 그리로 향합니다. 한참을 둘러보며 이것 저것 만지는데, 둘째 찬이가 사달라고 졸라대는 장난감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렇게 써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을 물리치는 *** 레인저”
찬이는 얼마전 TV에서 한창 방영되었던 ‘파워포스 레인저’라는 프로그램 탓에 색깔이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가면을 쓰고 있는 캐릭터는 죄다 동일시의 대상어서 앞으로 양주먹을 차레로 내지르며 이내 구매욕을 터뜨리곤 합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얼러보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여 겨우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을 내려 놓게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상자 겉에 써있던 케치 프레이즈가 마음에 걸립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 미래 전사에 걸맞는 맞상대를 설정하려다 보니 외계인이었을 것이고, 지구를 지킨다는 준법적인 명분을 찾다보니 ‘환경파괴’라는 화두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문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환경 파괴의 주범을 외계인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려는 장사속이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속된 습성이 뭍어 있는 것는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을거라 했나요. 무릉도원에 사람 손이 닿으면 한달도 채못가 더 이상 이름값을 하지 못할 것이라지요. 지구 자원 남용과 환경파괴 최대의 주범인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도 모자라 화성에서 약탈해 올 천연가스로 떼돈을 벌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지요. 그 뉴스를 보았을때는 정말이지, 화성에 외계인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만약 화성인이 그 별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그네들은 그들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그랬듯이 가만놔두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런데 지금껏 인간의 상상력은 외계인이 침략해 온다 하였습니다. 정작 우리들이 책임져야할 죄악된 모습을 외계인에게 둘러 씌우고, 마치 우리들이 피해자인양 의로운 사람인양 장난감에도 새겨 놓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신성한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린다.“ [오렘 리온스 / 인디언 오논다가 족]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면의 평화가 있다하면서도 다른 존재자의 신음에 무감각한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닙니다. 나의 책임이며 나의 죄인 것을 타인이게 전과시키는 모습이라면 그 순간 그리스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책임조차도 당신 것인양 지고 가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 마음의 기쁨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이어든, 그 기쁨은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이며, 풀잎소리에, 풀잎바람에 귀를 대고 우주를 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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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도 같은 짓을 하면서 남이 그런 짓을 한다고 심판하는 자가 있는데,
그런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것 같습니까?
[로마서 2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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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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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0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이 세상에서 궁핍하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만물의 주님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할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하는 이들은 선행을 할 재물이 없을까봐 절대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저 과부는 동전 두 닢으로 그의 신앙심이 칭송받았으며, 흔쾌한 적선은 냉수 한 잔으로도 그 상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실 경건한 이들의 선함은 사랑에 따라 그 진정한 크기가 정해지며,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습니다. <大 레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빈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처음 지적한 알렉산더의 클레멘트 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것과 관련해 가난해지는 것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반면 욕심에 끌려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잘못이다“
클레멘트의 시대와 오늘날의 사회구조는 비교할 수 없을 많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재물을 모으고 쓰는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질을 모으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과 인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필터링 작업에 속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자가 되기까지의 수없이 많은 부정과 부패가 문제이며, 또한 부자이면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초대교부 요한 크리소스톰 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눅16:19-31)에서 부자가 그의 소유를 나누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는다”는 大 레오의 말은 우리에게 ‘자기부정’ 과 더불어 ‘자기충족’ 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담백하고도 번득이는 혜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사실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다른 무엇이 꿰차고 앉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말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심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뻣세고 우둔한 우리에게 오셔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함께 공감하시고, 함께 울웃으시고 함께 식탁의 축제를 벌여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연민이나 값싼 동정심이 아니었으며, 서슴없이 제자로, 형제로, 친구로 불러주신 자비로운 우주의 울림 이었던 것입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선을 그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부와 가난에의 ‘인식’을 스스로 조회해볼 뿐입니다. 나를 비워 주시고, 나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버려왔고 무엇을 채워왔는지를, 내 안에 자비심을 늘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하나님 자비심에 비추어 돌아봐야겠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11-12절]
■■■■
<2004.03.09>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이 세상에서 궁핍하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만물의 주님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할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하는 이들은 선행을 할 재물이 없을까봐 절대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저 과부는 동전 두 닢으로 그의 신앙심이 칭송받았으며, 흔쾌한 적선은 냉수 한 잔으로도 그 상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실 경건한 이들의 선함은 사랑에 따라 그 진정한 크기가 정해지며,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습니다. <大 레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빈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처음 지적한 알렉산더의 클레멘트 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것과 관련해 가난해지는 것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반면 욕심에 끌려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잘못이다“
클레멘트의 시대와 오늘날의 사회구조는 비교할 수 없을 많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재물을 모으고 쓰는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질을 모으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과 인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필터링 작업에 속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자가 되기까지의 수없이 많은 부정과 부패가 문제이며, 또한 부자이면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초대교부 요한 크리소스톰 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눅16:19-31)에서 부자가 그의 소유를 나누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는다”는 大 레오의 말은 우리에게 ‘자기부정’ 과 더불어 ‘자기충족’ 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담백하고도 번득이는 혜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사실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다른 무엇이 꿰차고 앉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말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심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뻣세고 우둔한 우리에게 오셔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함께 공감하시고, 함께 울웃으시고 함께 식탁의 축제를 벌여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연민이나 값싼 동정심이 아니었으며, 서슴없이 제자로, 형제로, 친구로 불러주신 자비로운 우주의 울림 이었던 것입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선을 그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부와 가난에의 ‘인식’을 스스로 조회해볼 뿐입니다. 나를 비워 주시고, 나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버려왔고 무엇을 채워왔는지를, 내 안에 자비심을 늘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하나님 자비심에 비추어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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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1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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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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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9
자기 자신의 거룩성
이때는 온순과 인내와 평화와 평온함의 때입니다. 이때에 모든 악습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오래 지속될 덕들을 닦도록 해야합니다. 지금은 경건하고 용감한 영혼들이 다들 이들의 잘못들을 용서해 주고, 받은 능욕을 새겨두지 않으며, 모욕을 잊는 습관을 쌓을 때입니다. 지금은 충실한 영혼이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가지고 자신을 단련할 때입니다. 그래서 ‘영예를 얻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악평을 받거나 호평을 받거나’(고후6:7-8) 언제든지 평온한 양심과 항구한 성실성으로 칭찬에 들뜨지 말고 모욕에 의기소침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신앙심 있는 사람들의 단정한 태도는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모습 입니다. <大 레오>
자기중심적 삶self-centrism 은 자아에의 욕구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욕구는 바로 이 자기 중심적 삶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지극히 건강한 모습입니다. 완전한 이타적 삶은 건너뛸 수 없는 완전한 자기중심적 삶의 다음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반성적 삶self-reflection 은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출발됩니다. 이는 다른 존재자들의 방식을 존중하며 상생적 가치를 도모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인식의 선로가 ‘나’에게로 향한 것은 자기중심적 삶과 동일하나, 이는 회귀적 구조로서 나로 향한 인식은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을 향하여 언제나 관계성 안에서의 조화를 꿈꾸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두가지 삶의 방식은 자기 정체성self-identity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동화同化되는 순간은 그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스스로 긍적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당한 정체성에 기인한 이러한 자기 인식은 참으로 건강하고도 신신한 맛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자기중심적 삶 은 ‘자아에의 욕구’가 왜곡되어 편협하고도 좁다란 인식의 방향이 오직 ‘나’에게로만 향한 나머지
나 이외의 존재자들에 대한 시선 확장은 의심과 대상화로 일관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만의 안위와 편리만을 추구하는 왜소한 인간성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 뿐입니다. 또한 공허한 자기반성적 삶 은 자기 확신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모습으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땅속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한숨쉬는 나머지 거울을 닦다 거울을 깨버리는 무지한 미성숙에로 남게되고 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데데한 평가만 내리는 사람은 그 기운이 얇고 흐려 초췌한 정신으로 배리背理할 뿐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겠다는 것緣木求魚은 와신상담과 다르며,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살신성인하는 사람에 비할 수 없습니다. 大 레오가 제시한것처럼 쉽게 들뜨거나 상처받아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는 것은 순전한 자아정체성을 발판삼아 서서 고른 호흡이 가능할 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지음 받은 많은 뜻 가운데 으뜸은 우리 안에 작은 우주를 지으시고 이치를 세워주신 그분의 뜻을 높이 받들어 그릇되거나 공허하지 않는 참 나를 이루며 사는 것 입니다. 그것이 大 레오가 말한 거룩한 삶임을 믿습니다.
■■■■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여러분은 부지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할 것이며
마침내는 그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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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자기 자신의 거룩성
이때는 온순과 인내와 평화와 평온함의 때입니다. 이때에 모든 악습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오래 지속될 덕들을 닦도록 해야합니다. 지금은 경건하고 용감한 영혼들이 다들 이들의 잘못들을 용서해 주고, 받은 능욕을 새겨두지 않으며, 모욕을 잊는 습관을 쌓을 때입니다. 지금은 충실한 영혼이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가지고 자신을 단련할 때입니다. 그래서 ‘영예를 얻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악평을 받거나 호평을 받거나’(고후6:7-8) 언제든지 평온한 양심과 항구한 성실성으로 칭찬에 들뜨지 말고 모욕에 의기소침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신앙심 있는 사람들의 단정한 태도는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모습 입니다. <大 레오>
자기중심적 삶self-centrism 은 자아에의 욕구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욕구는 바로 이 자기 중심적 삶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지극히 건강한 모습입니다. 완전한 이타적 삶은 건너뛸 수 없는 완전한 자기중심적 삶의 다음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반성적 삶self-reflection 은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출발됩니다. 이는 다른 존재자들의 방식을 존중하며 상생적 가치를 도모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인식의 선로가 ‘나’에게로 향한 것은 자기중심적 삶과 동일하나, 이는 회귀적 구조로서 나로 향한 인식은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을 향하여 언제나 관계성 안에서의 조화를 꿈꾸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두가지 삶의 방식은 자기 정체성self-identity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동화同化되는 순간은 그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스스로 긍적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당한 정체성에 기인한 이러한 자기 인식은 참으로 건강하고도 신신한 맛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자기중심적 삶 은 ‘자아에의 욕구’가 왜곡되어 편협하고도 좁다란 인식의 방향이 오직 ‘나’에게로만 향한 나머지
나 이외의 존재자들에 대한 시선 확장은 의심과 대상화로 일관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만의 안위와 편리만을 추구하는 왜소한 인간성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 뿐입니다. 또한 공허한 자기반성적 삶 은 자기 확신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모습으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땅속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한숨쉬는 나머지 거울을 닦다 거울을 깨버리는 무지한 미성숙에로 남게되고 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데데한 평가만 내리는 사람은 그 기운이 얇고 흐려 초췌한 정신으로 배리背理할 뿐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겠다는 것緣木求魚은 와신상담과 다르며,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살신성인하는 사람에 비할 수 없습니다. 大 레오가 제시한것처럼 쉽게 들뜨거나 상처받아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는 것은 순전한 자아정체성을 발판삼아 서서 고른 호흡이 가능할 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지음 받은 많은 뜻 가운데 으뜸은 우리 안에 작은 우주를 지으시고 이치를 세워주신 그분의 뜻을 높이 받들어 그릇되거나 공허하지 않는 참 나를 이루며 사는 것 입니다. 그것이 大 레오가 말한 거룩한 삶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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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여러분은 부지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할 것이며
마침내는 그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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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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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8
세상속 이 길에서
사실 어떠한 현혹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어떠한 원욕에도 전혀 자극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온통 유혹들로 가득 차 있는 현세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복된 사도 요한이, “우리가 죄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같이 그런 생각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大 레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선하게 지음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지난한 과정에 있어 예기치 못한 죄악의 모습을 닮아가곤 합니다. 이는 바울 사도의 고백에서처럼, 우리 안에 원치 않는 마음이 스며들어 사로잡아 허수아비 팔에 앉아 있는 참새마냥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사밀한 구석까지도 내버려 두지 않으며, 비교 우위를 점령하기 위한 손짓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세속에서 떠나 고독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던 것은 속세를 떠난 한적한 곳에서 규율과 수행의 시간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품기를 꿈꾸어 왔던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은, 그곳에도 세속의 여울은 여전하였는데, 상처와 용서가, 다툼과 화해가, 그리고 선과 악이 악어새 마냥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장된 자유함이나 완전한 선을 위한 시/공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서제가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인간이건 ‘사회성’이라는 산마루에 서서 여우바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서있는 이 산마루는 도리어 그 자체로 우리를 위해 예비된 성화聖化의 자리 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머물렀으나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셨던 것처럼, 님만 홀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가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사람이 있고, 죄가 있는 곳임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멀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도리어 자기만의 의義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유혹을 두려워하거나 애써 외면하지 않습니다. 죄가 많겠지만, 그보다 주님의 은총은 더욱더 창연蒼然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내가 ‘나’로 사는 바로 이 터에서 하나님 은총으로 햇빛촌을 이루며 사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초밤길을 걷듯 마냥 어둡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속 이 길 은 이미 주님이 걸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9-10절]
■■■■
<200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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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7
경축하기에 앞서
경축해야 할 축일이 크면 클수록 이를 경축하는 사람도 그만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축제의 날에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마음의 기쁨을 육체의 옷으로 표시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며 종교적인 태도로 여겨집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의를 더 기울여 교회 자체를 화려한 장식으로 꾸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진짜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지혜롭게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에게 구원을 주는 성례를 경축하기에 앞서 어떤 죄의 때가 자기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이중적인 마음의 주름이 자기를 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사람의 내면이 악습들로 오염되어 더렵혀져 있다면, 아무리 외적으로 잘 꾸며 말끔한 모습을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大 레오>
“현재 여성 단체의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전국에 걸쳐 ‘향락업소’는 30만 곳이 넘고, 여기서 일하는 여성은 120만명 가량으로 15-29세 여성 전체 인구의 2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2000년 10월 13일, 한겨레신문 칼럼, 김금수 ‘여자답게 살고 싶어라’에서]
저의 표현으로 ‘사회 비평계의 중견 테러리스트’인 홍세화 씨는 위의 기사를 읽고, 한국 사회를 모파상의 소설에 빗대어 ‘비곗덩어리’ 사회라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 전북 군산 대명동 ‘쉬파리골목’ 화재 현장에서 다섯 명의 매춘 여성이 감금 상태에서 도피하지 못하고 숨졌다는 보도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던 때에 씌여진 글이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하였습니다. 젊은 여성 다섯명 중 한명은 매춘을 하고 있는 사회. 대한민국의 밤 풍경은 향락없소의 불 빛과 교회의 십자가만이 지키고 있다고 했나요. 전혀 어울리지 않아야 할 이 두 불빛이 우리 사회에서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읽혀지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이루어왔던 유럽의 그것보다도 더 화려한 맘모스 교회들이 수도권에 집중해 있음에도, 이처럼 외마디 소리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한 줄의 복음도 아니었습니다. 간혹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몇 몇 훌륭한 성직자나 교회를 볼 때면 저자신이 부끄럽기도하면서 유난스런 자극을 받게되는 것은, 그 프로그램이 마치 “(못믿겠지만) 그래도 아직 이런 성직자가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모습은 없고 외양만 찬란-휘청이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빠스카와 성탄과 같은 기쁨의 날을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세상 속 저 아래 사람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나의 웃음과 화려함에 가려진 것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大 레오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읽혀집니다.
“얼굴에도 빛이 있어야지만 마음은 더구나도 빛이 나야한다”는 함석헌 선생 의 가르침처럼,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닦고創業 그것을 지키는데守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얼굴에 지는 주름이걸랑 인생의 경륜으로 기쁘게 받아두고,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마음에 진 주름을 펴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던 그들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그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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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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