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3
가장된 선의의 위험성
어떤 실체도 절대 악한 것은 아니며, 악 자체는 아무 본성도 될 수 없습니다. 선하신 창조주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으며,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우주 만물의 창조주는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곳에서 인간에게 음식과 음료로 제공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그 갖가지 종류의 성질에 있어서도 모두 거룩하며 깨끗합니다. 만일 욕심을 내어 무절제하게 먹는다 하더라도, 먹고 마시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지나침이지 음식이나 음료의 본성이 그들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大 레오>
성서의 예수님은 언제나 ‘먹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그도 그러셨을 것은 예수님은 늘 이쪽에서 저쪽으로 여행을 다니는 분이셨기에 육체적으로 피로하신 그분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시간은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기쁨과 감사의 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행과 더불어 ‘말하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회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배에서, 그리고 산에서 어디서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셨으며, 사람들‘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특별히 경구aphorism나 비유parable를 통해서 명쾌히 풀어내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나, 유독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 족족 반대하고 그를 죽이려는 음모도 서슴치 않았는데, 음식과 관련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겨하는 자’(눅7:34)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먹보요 술꾼’ (새번역성경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천륜을 거스린 패역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붙여서 그들을 길가에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율법적 근거가 있었습니다(신21:18-21). 그것은 언제 어느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눈의 가시를 잘라버기기 위한 수순을 천천히 밝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울 좋게도 ‘고르반’(막7:11)이라 하면서 부모를 내팽개치는 장본인은 정작 자신들이었으면서도 비난의 화살은 예수님에게로만 향했습니다. 예수님을 눈의 가시로 보던 사람들에게는 그가 먹고 마시는 것만 보았지,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교양없이 폭식을 하고, 술을 즐긴다는 유희적 현상몰이만 할 줄 알았지, 나눔과 치유의 참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둘레상에 기대어 앉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이 선포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에 자기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大 레오도 어거스틴 도 악은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악은 ‘인간 의지의 왜곡’이라 하는 것이 이 두 사람의 결론입니다.
좀 더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자면, “의지의 왜곡이라 함은 그 의지가 최고 실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 안에 깊이 놓여 있는 보배를 버리고 낮은 부분으로 떨어져 밖으로 부풀어 있는 것“입니다. 의지를 왜곡하는 이들은 쉽사리 법 위에, 하나님 위에 올라섭니다. 올라서려 내딛는 첫 걸음에서 의지의 왜곡이 가동되며, 완전히 올라선 이들은 부양浮揚된 마음으로 위험한 곡예를 벌이기 마련입니다. ‘선한 창조’의 본질을 너무나도 쉽게 외면하는 이들은 ‘현상’에 대한 자신들의 왜곡된 해석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번도 악의적 깃발아래서 자행된 적은 없었으나 그들이 들고 있는 ‘가장된 선의 깃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꺼풀을 벗겨낼 수 있는 깨어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손에 붙잡히셨고, ‘먹보요 술꾼’이라는 탄핵 발의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우리에게로 면면히 이어져 새로운 승리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2004년 3월 12일의 대한민국을 역사가 정당히 평가할 것을 믿으며]
■■■■
너희는 세례 요한이 와서 빵도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하고 마시기도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
[누가복음 7장 33-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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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2>
가장된 선의의 위험성
어떤 실체도 절대 악한 것은 아니며, 악 자체는 아무 본성도 될 수 없습니다. 선하신 창조주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으며,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우주 만물의 창조주는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곳에서 인간에게 음식과 음료로 제공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그 갖가지 종류의 성질에 있어서도 모두 거룩하며 깨끗합니다. 만일 욕심을 내어 무절제하게 먹는다 하더라도, 먹고 마시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지나침이지 음식이나 음료의 본성이 그들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大 레오>
성서의 예수님은 언제나 ‘먹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그도 그러셨을 것은 예수님은 늘 이쪽에서 저쪽으로 여행을 다니는 분이셨기에 육체적으로 피로하신 그분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시간은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기쁨과 감사의 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행과 더불어 ‘말하는 사람’ 으로 등장합니다. 회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배에서, 그리고 산에서 어디서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셨으며, 사람들‘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특별히 경구aphorism나 비유parable를 통해서 명쾌히 풀어내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나, 유독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 족족 반대하고 그를 죽이려는 음모도 서슴치 않았는데, 음식과 관련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겨하는 자’(눅7:34)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먹보요 술꾼’ (새번역성경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천륜을 거스린 패역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붙여서 그들을 길가에서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율법적 근거가 있었습니다(신21:18-21). 그것은 언제 어느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눈의 가시를 잘라버기기 위한 수순을 천천히 밝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울 좋게도 ‘고르반’(막7:11)이라 하면서 부모를 내팽개치는 장본인은 정작 자신들이었으면서도 비난의 화살은 예수님에게로만 향했습니다. 예수님을 눈의 가시로 보던 사람들에게는 그가 먹고 마시는 것만 보았지,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교양없이 폭식을 하고, 술을 즐긴다는 유희적 현상몰이만 할 줄 알았지, 나눔과 치유의 참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보지 못하는가 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둘레상에 기대어 앉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이 선포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에 자기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大 레오도 어거스틴 도 악은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악은 ‘인간 의지의 왜곡’이라 하는 것이 이 두 사람의 결론입니다.
좀 더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자면, “의지의 왜곡이라 함은 그 의지가 최고 실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 안에 깊이 놓여 있는 보배를 버리고 낮은 부분으로 떨어져 밖으로 부풀어 있는 것“입니다. 의지를 왜곡하는 이들은 쉽사리 법 위에, 하나님 위에 올라섭니다. 올라서려 내딛는 첫 걸음에서 의지의 왜곡이 가동되며, 완전히 올라선 이들은 부양浮揚된 마음으로 위험한 곡예를 벌이기 마련입니다. ‘선한 창조’의 본질을 너무나도 쉽게 외면하는 이들은 ‘현상’에 대한 자신들의 왜곡된 해석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번도 악의적 깃발아래서 자행된 적은 없었으나 그들이 들고 있는 ‘가장된 선의 깃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꺼풀을 벗겨낼 수 있는 깨어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손에 붙잡히셨고, ‘먹보요 술꾼’이라는 탄핵 발의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우리에게로 면면히 이어져 새로운 승리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2004년 3월 12일의 대한민국을 역사가 정당히 평가할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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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례 요한이 와서 빵도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하고 마시기도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난다.
[누가복음 7장 33-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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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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