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 Writing2(2004-2007)'에 해당되는 글 46건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
2012.03.22
사실 우리가 죽은 ‘후’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공간상의 사후세계를 알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후세계를 알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부터 죽음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게 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죽기 ‘전’에 진정으로 살 것이냐이다. - 모리스 젱델 -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갔습니다. 이때껏 절이나 무당을 찾아 가서 불공을 드린 것이 유일한 종교적 문화 체험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나도 낯선 교회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교회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되면서, 즉 교회에 다니는 맛을 알게 되면서 방과 후에는 매일 교회에 나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 되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던 당시를 회상해보면, 너무 지나치리만큼 교회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곤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뜨거운 체험, 그 순간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입니다. 그 후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제일 행복했었기에 거리에 붙여있던 벽보를 보고 당시 인천에서 행해진 집회란 집회는 거의 죄다 참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성령체험을 하면서 곧바로 제 머리에 주입되었던 것이 [종말론]이었습니다.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고, 그것을 대비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대학 3학년이었던 1992년 10월26일,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다미선교회를 고교시절 미리 접했더라면 어쩌면 저도 거기에 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마만큼 학창시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전도에 열심을 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 3년 내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집회에 참석했던 것일 정도니까요. 당시 고교생이었던 저는 인천, 서울, 대전, 부산, 평택, 수원 등등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날이 곧 다가온다는 이 무시무시한 말을 무기로 삼아 귀찮게 굴지 말라며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던 부산의 어떤 뱃사람 앞에서도 그다지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가 생생합니다. 벌써 15년이 훨씬 지난 그 때이지만 그 때 제 가슴에 품었던 비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고교시절의 추억입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이 종말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여타의 다른 교리나 신학 장르 중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구원론 등등의 중요한 신학적 진술들과 더불어 읽혀질 때 비로서 종말론은 올바른 꼴로 신앙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교시절의 제 모습이 때론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론 부끄럽기도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당시 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행한 설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으면서도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만 골라서 편식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오시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종말이 지연되면서 의견이 분분하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내가 전에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각각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십시오”[살전4:11]라고 권면하면서,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바탕이요 으뜸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윗 글에서 모리스 젱델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오해할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생활이 훗날 우리가 기약하는 그 세상에서의 삶과 이질적이라면, 훗날의 기약은 도리어 현실 생활을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현실의 시/공과 공감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나누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 [이 자리에서] / [거기 있는 존재Da-Sein]로서 온당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꽃에서 우주를 보고, 모래알 속에서 영원을 보는 눈은 시인 블래이크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맛볼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심판과 구원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동일한 메시지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9>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 공동체의 기반 (0) | 2012.03.22 |
---|---|
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0) | 2012.03.22 |
산만散漫과 침잠沈潛 (0) | 2012.03.22 |
온유한 사람들 (0) | 2012.03.22 |
인간의 생명성 (0) | 2012.03.22 |
산만散漫과 침잠沈潛
마르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산만한 호기심도 끊임없이 지껄이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하이덱거는 산만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그와 참으로 함께 있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산만한 호기심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어느 한 곳에 차분하게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이리저리 부산하게 왔다갔다한다. 산만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항상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서는데 이 경우에도 찾은 새로운 것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오직 또 다른 종류의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새로운 것을 찾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진리 하나를 알아 내려고 애쓰는 경우에도 알아낸 진리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음미하고 침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심을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옮기기 위해서 이다. 그는 어느 하나에도 제대로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 안셀름 그륀 -
끊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를 피치 못해 접하고 살아야 하는 요즈음, 10년전 번역 출간된 책 반 퍼슨의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Cultuur in Stroomversnelling를 떠올려 봅니다. 반퍼슨에 의하면 인류는 신화적 단계, 존재적 단계, 그리고 기능적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각각의 단계는 장점과 단점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데, 오늘날의 사회 문화를 그는 ‘기능적 단계’로 명명하며, 이 문화의 부정적인 힘을 조작주의operationalism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상호관계를 마치 장기판의 말이나 카드 놀이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처리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조작주의는 인간을 거대한 기계속에 맞춰진 나사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반퍼슨의 지적은 근대 300년의 변화보다 근래 30년의 변화가 더 빠르며, 근래 30년의 변화보다 최근 3년의 변화가 더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 [인간]과 [시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요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을 놓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화두가 되어 틈새 시간을 이용하고, 새벽형 인간이 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은 그마만큼 인간 사회의 구성이 급속도로 치열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틈새 시간과 새벽형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기 보다는 그런 인간형이 되어서 성취하고자 하는 내용이란 것이 본래적 인간의 모습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알뜰살뜰한 시간 탐색과 더불어 더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접하며 살고 있는 시대와 문화의 본질을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의 본질을 면밀히 검토하고 이해하여, 그것에 흔들리거나 맹목적으로 추종, 혹은 거부하는 삶이 아니라 그것들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조금씩 변혁해 나가는 힘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덱거의 지적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산만散漫할 것인가 아니면 침잠沈潛해 볼 것인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화되고 있는 오늘 날 교회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다양하고 새로운 것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말하고 싶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산만하고, 저급하다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여기 저기 자칫 산만해 보이는 여행을 다니시며 공생애를 다 보내신 예수님도 침잠의 때를 놓치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과 침묵 사이의 조율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겠습니다.<2004.04.17>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0) | 2012.03.22 |
---|---|
지금과 거기 (0) | 2012.03.22 |
온유한 사람들 (0) | 2012.03.22 |
인간의 생명성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2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0) | 2012.03.22 |
온유한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각과 상상력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상징적 표상들을 선택하고자 하셨을 때 비둘기와 어린양 두 가지를 택하셨는데 그 둘은 결국 하나닙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활기, 부드러움, 생동력을 나타내고 어린양은 거룩한 희생물이신 그리스도의 온유, 보잘 것 없음, 겸손을 상징합니다. 자신을 술수에 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로 사자나 그와 유사한 동물을 택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리석게도 무분별한 폭력이 이 땅을 좀더 빨리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을 그런 식으로 정복하려 하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격 깃발들 위에 수놓은 사자나 호랑이나 뱀에 대해 똑같은 지향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또 다른 사자, 호랑이, 뱀들이 맞서게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전투가 벌어진 날 저녁, 폭력을 앞세운 양쪽 진영이 피로 물든 호숫가에서, 무수히 파괴된 산 속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심한 상처들을 싸매고 나면 잠시 그 크나큰 두려움을 잊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깃발들 위의 사자를 더 포악한 일그러진 얼굴로 장식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좋은 기회가 와서 우리 편이 승리하여 진짜 영원한 우리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이 위험한 놀이가 ‘미쳤다. 모두가 미쳤다’라는 한 마디로 밖에는 정당화될 수 없는 무의미한 놀이가 아닙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게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땅을 온유함으로 차지해야 합니다. - 까를로 까레또 -
우리 마음의 폭력성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이는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무의식이 외적 조건과 결탁하는 순간 저절로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는 자비와 평화, 그리고 용서가 있고, 또한 누구나 마음 속에는 증오와 전쟁과 복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획일적이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상처를 받을 수도, 또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자기-통제적 인간으로, 또한 자기-결단적 인간으로서 우리는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항해하는 가운데 단순한 매뉴얼에 매여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이우려 달려드는 세찬 파도에 맞설 수 있는 영적 자생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고귀한 가치들은 잠재워 두고 자신의 외적 욕심에 부합하는 내면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섣부른 가치를 외적 세계속에 풀어 놓고자 하는 나머지, 그것이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을 예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면서 양쪽 진영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아!”하셨던 주님의 마음, 그것은 맹목적인 선의로 무장하여 만족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즘생스런 자신의 폭압성을 처연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이 온유한 사람들입니다.<2004.04.16>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과 거기 (0) | 2012.03.22 |
---|---|
산만散漫과 침잠沈潛 (0) | 2012.03.22 |
인간의 생명성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2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1 "사랑의 절정, 십자가" (0) | 2012.03.22 |
우리 본바탕이 문제다. 그것을 피어내야 한다. 생명은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피血다. 같은 생명이 피기에 따라 잎이 되고, 꽃이 되고, 동물이 되고, 사람이 되고, 노래, 춤, 학문, 영이 된다. 사람의 생명은 그 됨이 과일과 같다. 겉에 아름다운 과피果皮가 있고, 그 다음 맛있는 과육果肉이 있고 맨 속에 씨가 있다. 껍질이 곱지만 그것은 눈을 끌자는 것뿐이지, 먹을 때는 벗겨 버린다. 그러나 맛있는 살을 다 먹혀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것은 본래 주잔 것이다. 먹는 놈 저는 도둑질로 알고 먹었지만 씨 편에서 보면 먹히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그 씨를 땅에 던져 줌을 얻기 위하여다. 아무리 잘 먹으도 씨는 못 먹는다. 씨는 도둑질 못한다. 도둑질할 필요 없이 도둑질하려도 할 수 없는 것이 씨다. - 함 석 헌 -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통털어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각양 모양새로 변화무쌍하며 현실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힘이됩니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대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의 가장 민감하고도 중요한 부분에 그 나라의 국민 정신은 그대로 발현됩니다. 이미 발현된 정신은 인간의 사밀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또 다시 인간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과도 같이 인간의 정신은 지난한 세월을 뒤로하고 이로써 차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세계를 맑게하는 것은 비록 척박한 일상이라 하더라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신세계가 흐려진다면 세상도 어두워 집니다. 깨어 있는 정신이 적으면 적을수록 세상은 더욱 더 잠자고만 있을 것입니다. 정신과 세상의 문제는 모종의 신비적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피부로 맞대어 느끼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피어나는 생명은 스스로 내어 주는 생명입니다. 스스로 내어줌으로 해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맺는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고, 그분의 영광이 찬연한 이유 입니다. 특별히 인간에게 있어 생명의 기반은 피血이기에, 흐르지 않고, 뜨겁지 않은 피는 생명의 진위에 의심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을 찬미한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해 집니다. 그분의 보혈은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그 피가 우리에게 전이됨으로써 우리도 그분 생명을 닮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 속에 피가 움직여 마음이고 생각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생각, 곧 정신은 그분을 닮아 가기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줄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할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4>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만散漫과 침잠沈潛 (0) | 2012.03.22 |
---|---|
온유한 사람들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2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1 "사랑의 절정, 십자가"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0 "이성적 영혼" (0) | 2012.03.22 |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마니의 주장에 따라 주님께서 수난을 겪지 않았으니 그분에게 부활도 없었다고 하는가 하면,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 따라 말씀의 신성 자체가 수난받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거나 그리스도교 백성의 귀에 이것을 주입시키는 작태는 우리 종교의 기초를 뒤집어놓는 일이며, 하나님의 참 아들께서 동시에 사람의 참 아들이시라는 사실 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大 레오>
다시 한번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로마 병정들에게 얻어 맞으시면서 짐승처럼 끌려가서는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는 가운데 양손이 묶여진 채로 힘 없이 엎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은 태형을 시작합니다. 화면으로 보이는 병정이 들고 있는 채찍 끝에는 쇳조각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인들은 태형에 사용하는 채찍이 많게는 30-40 가닥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채찍 끝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쇳조각은 사람의 몸에 박혀 살점을 도려내고, 더 깊숙이 박힌 쇳조각은 잘 빠지지 않아 다시 힘을 주어 잡아 당겨서 빼내야 할 정도로, 사람에게 가하는 태형은 사형 집행을 하기 위한 전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사형 집행 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 는 “태형을 당하는 사람들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붉게 물든 허연 뼈가 노출되기도 했으며, 내장이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실제 현상을 목격한 이로써 증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인류는 악마적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양 영화 속에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로 줄곧 등장하는 ‘드라큘라’는 낮에는 수려한 외모로 사람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다가도 밤이 되면 뜨악스런 송곳이를 드러내고 인간의 동맥을 뜯어 수혈을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서양인들은 이러한 두려운 존재를 상상하면서 그런 존재를 이길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제물이 될 형편이었지만, 십자가를 지니고, 십자가를 그들 앞에 높이 추켜 세울 때 그들은 눈을 가립니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드라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며 들고 서 있는 이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런 악마적인 존재들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상상력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하도록 힘없는 피살인자의 피였지만 그가 흘리신 피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피보다도 값진 피였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적 존재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피에서 나온다 믿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지극히 정당한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 사상가들은 신성과 인성이 한데 연합하는 것에 반감을 갖은 나머지 신성과 인성의 양 극단 어느 것만을 선택하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있는 예수 안에 신성이 있음을 부인하거나, 혹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이 단지 육체를 걸치고 있던 존재였다고 주장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참 인간이 죽은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이 시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위한 쇼show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태형을 당하시거나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예수님은 신적 존재의 두루마기를 걸친 분이 아닙니다. 낭자狼藉한 그분의 피를 모종의 전위 퍼포먼스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발상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분의 자비심, 그분의 분노, 그분의 고통이 모두 인스턴트 액션이란 말입니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런 예수가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참 인간의 죽으심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눈물과 피로 기도하신 겟세마네의 기도 또한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를 하나님께 토로하는 어험한 순간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 에서 영주인 코도Cawdor가 들었던 “그의 삶에서 그가 삶을 떠나는 것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것도 없었다”는 말은 정확히 예수에게도 어울릴 정도로 모진 질고를 온통 겪으신 그분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터널을 붙잡아 껴안고 지나신 그분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 2000년전 오늘, 당신은 당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가요?
■■■■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
<2004.04.08>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유한 사람들 (0) | 2012.03.22 |
---|---|
인간의 생명성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1 "사랑의 절정, 십자가"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0 "이성적 영혼"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9 "각자이게 주어진 대로"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1
사랑의 절정, 십자가
이 십자가는 죽음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부채負債에 전혀 해당되지 않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大 레오>
멜 깁슨이 만든 "The Passion of The Christ" 가 국내에서도 개봉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만든 멜 깁슨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모습을 가능한 여과없이 생생하게 재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화면을 메우는 장면마다 예수님의 피로 붉게 물들고, 보는 이로 하여금 고통스런 예수님의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휘몰아 치던 절망의 고통을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마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처참한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극악한 공포심을 우리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됩니다.
신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한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늙어서 죽었다면 여러분의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 즉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한결같이 교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교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까?”
“그분이 속죄양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그 학생에게 재차 질문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에, 사람들을 만나 ‘네가 구원받았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 ”
다소 잠잠한 상태에서 웅성대는 틈을 타서 교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보여주신 모습만으로도 우리 주님으로서 충분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라도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초보적인 수업시간이었습니다만, 당시에 제가 받았던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보혈’에만 집중된 제 신앙에 뭔가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선포하신 수많은 구원 사건에는 그다지 큰 가치를 두지 못했던 모습이 오히려 회개해야 할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사람들을 만나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원의 모든 필요충분 조건을 보았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분의 ‘삶’만으로도 “예수님은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기에 충분해진 것입니다. 많은 이들과 만나 자신을 희생하고 참된 자비심을 보여주신 그분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사랑한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였으며,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을 표현해 주시되, 죽으시면서까지 사랑을 표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절망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에 그들의 모습에 애달픈 마음으로 사랑해주셨다면,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하신 기도는 얼마나 처연하고도 숭고한 사랑이었겠습니까.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영광이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라면,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은 또한 얼마나 영롱한 하나님의 영광이었겠습니까.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무한한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사랑한다 하셨지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닌 사랑이었으며, 끝임과 동시에 새로이 겉잡을 수 없이 일어났던 사랑의 불이었던 것입니다.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1절]
■■■■
<2004.04.07>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생명성 (0) | 2012.03.22 |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2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0 "이성적 영혼"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9 "각자이게 주어진 대로"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8 "기도하는 마음"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0
이성적 영혼
이성적인 영혼 은 “육이 영을 거슬러 욕정을 일으키고 영이 육을 거슬러 일어날 때”(갈5:17)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움을 받아서 대비합니다. 또 그런 영혼은 절제의 못들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유혹하는 해로운 원욕들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大 레오>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신비의 근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짧디 짧은 단견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 비추어 볼 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다는 것, 아니 우리가 모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도 같은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실 때에 우리 안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독일 관념론의 창시자라 불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의 두 원천을 감성과 오성이라 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감성Sinnlichkeit 은 인식에 있어서 다양한 재료를 제공해 주고 오성Verstand 은 그 재료에 통일적인 형식을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는 저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서의 말에서 처럼, 인간의 인식은 이 두가지 원천이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본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혹은 무언가를 계획하고, 평가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식에서 감성과 오성이 주고 받는 현상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세상에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이념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념의 예로서 그가 제시한 것은 영혼, 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영혼의 불멸성, 우주의 무한성, 신의 존재와 섭리 등에 관해서는 감성과 오성으로부터 해답을 얻어 낼 수 없기에, 이러한 이념을 대상하는 하는 것을 이성Vernunft 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인간의 인식을 이처럼 세분화한 것은 독일 관념론Deutscher Idealisumus의 정초가 되었다는 단순한 의미를 떠나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적 능력이 우리로 하여 하나님 인식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고, 이로써 ‘생각하는 자아’는 ‘책임적 자아’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 즉 ‘요청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칸트의 언명은 당대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분명 이성적 존재 입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단순한 ‘오성적 존재’를 뛰어 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리원칙이나 논리성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궁극적인 선과 악에 대해 바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들은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눈 뜨고 보아, 그 은총을 ‘은총 그 자체"로 올바로 인식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이 신비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각해왔던 것은 그마만큼 우리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과신過信하거나, 혹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무감각해져버린 까닭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뜰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이성적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이성을 조화 속에 운용할 수 있는 것이 남겨진 과제입니다. 올바른 이성적 인간은 자기를 유혹하는 해로운 원욕들이 무엇인지 바로 인식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하는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가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지신 사건 안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따라 갈 수 있는 용기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적 존재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맛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창조를 갈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하는 사람은 성 어거스틴의 고백과도 같이 “당신은 곧 나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려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13절]
■■■■
<2004.04.06>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2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0) | 2012.03.22 |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1 "사랑의 절정, 십자가"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9 "각자이게 주어진 대로"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8 "기도하는 마음"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7 "온전케 하시는 주를 따라"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9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그러므로 어느 때가 경건하게 살아야하는 것처럼 어느 때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니, 각자 자기 방식과 정도에 따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해라는 이름은 하나지만 싸움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며, 드러난 원수보다는 숨은 음모자에게서 오는 더 큰 위험이 종종 도사리고 있습니다. <大 레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주시고, 그들이 가는 길이 굽이굽이 험난한 길일지라도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함께 해 주십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에 개개인의 소소한 역사속에 배어 있는 지난한 아픔과 상처들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상처요 아픔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과정을 걸어가는 믿음의 도정은 또한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그려주신 선명한 발자취를 좇아 걷는 과정에서 때로 기뻐하고 삶의 환희를 누리며 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려진 이정표로 인해 당황하기도 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대 레오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맞는 십자가를 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박해라는 이름은 하나이지만, 싸움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밥상위에 올라오는 그릇은 용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듯이 동일한 크기나 동일한 내용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고기를 담은 그릇이라 해도 소금 종지만 못할 때가 있듯이, 그 가운데 어느 것은 중요한 것이고 어느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탐색과 발견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이어서 우리에게 어울리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담을 수 있는 내용물은 무엇이고 잘 씻겨져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우리가 물감이어서 내게 적합한 색상을 선별하려면 나는 무슨 색이며 다른 색과 혼합될 때의 변형된 모습을 견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리스 젱델Maurice Zundel 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태양처럼 늘 ‘이미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신다.
부재중인 것은 우리이다. 그분의 빛을 가로막는 벽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 마음이 부숴진 조각마음이면 영롱한 하나님의 모습도 단지 섬벅거리는 램프처럼 보일 것이며 혹 우리 마음이 뿌옇게 내려앉은 티끌마음이면 의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부질없는 억지시늉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은총의 선물을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 살아가십시오.
[고린도전서 7장17절]
■■■■
<2004.04.03>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1 "사랑의 절정, 십자가" (0) | 2012.03.22 |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0 "이성적 영혼"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8 "기도하는 마음"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7 "온전케 하시는 주를 따라"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6 "우주적 그리스도"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8
기도하는 마음
사실 우리는 그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그분을 통해서야 모든 본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다면 그것은 우리가 명령하시는 분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大 레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은 한결같습니다. 옳고 곧은 모습으로 한결같았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선택받은 자의 모습에 합당치 못한 모습으로 불평과 교만 그리고 무지와 배신으로 일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께서는 왜 하필 그런 이들을 선택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던 "대화의 달인"이라 해도 무방하신 분일진데 어쩌다가 그런 이들을 제자로 부르셔서 갖은 낭패를 겪으셔야 했을까 싶습니다. 12명의 제자 모두에게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지한 제자들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기도 하셨으며 가룟지방 출신의 유다에 의해 짐승처럼 팔려가는 사나운 꼴을 당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답답함의 연장속에서, 우리 주님은 어떻게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어떻게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한 배에 동승한 채로 부활의 새벽으로 건너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눈물 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위에 올라앉아 폭거의 칼날을 휘두르던 이들에게는 부릅뜬 눈을 하고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셨지만, 소조히 살아가는 마음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비의 눈으로 다가서신 분이십니다. 곧 흘러내릴 것 같은 송아지 눈을 하고 서신 그분의 마음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사랑과 자비가 폭포를 이루는 하염없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시기를 잊지 않으셨는데 그 기도는 절망으로 엄습하는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려는 의지의 눈물이요, 동시에 희망을 예감하는 환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그분의 기도는 눈물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
진디밭에 쓰러진
분홍색 상사화를 보며
혼자서 울었어요
쓰러진 꽃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하늘을 봅니다
비에 젖은 꽃들도
위로해주시구요
아름다운 죄가 많아
가엾은 사람들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보고 싶은 하느님
오늘은 하루 종일
꼼짝을 못하겠으니
어서 저를
일어켜주십시오
지혜의 웃음으로
저를 적셔주십시오
[작은 위로 / 이해인詩]
■■
아마도 주님의 마음은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예수께서도 시인의 마음처럼 무너진 꽃잎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을 찾았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셨기에 그토록 사람에 대한 기대를 걸고 아낌없는 애정을 다하셨음에도 끝끝내 배신의 뒷걸음질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쓰러지는 마음을 들킬새라 도리어 담담하게 끌려가셨던 예수 그리스도.
우리도 때로는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으로 인해 도리어 가슴아파하며 어찌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웃으며 지내던 이로부터 칼날같은 비수의 말을 들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한 현상으로 여겼던 잘잘한 일들이 우리의 가슴을 쾅하고 내리 때려 그로 인해 심한 죄책감을 갖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던지는 크고 작은 물음들을 맞대하고 섰을 때, 어디서 지혜를 구하며 어디서 하소연을 해야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시인 처럼 "보고 싶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인이 중보기도하는 "아름다운 죄"가 아니라 "추한 죄"라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지만, 내 몸 하나 건성하기도 힘든 초라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안심할 수 없다는 솔직한 마음 하나만 들고서 그분 앞에 나아가 앉습니다. 비록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는 아닐지언정 우리도 언젠가는 이러지 않을 수 있겠지요. 하나님? 보고 싶은 하나님.
■■■■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이에게 기꺼이 베퓌고 나무라시지 않는 하나님께 청하시오 .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5절]
■■■■
<2004.04.02>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0 "이성적 영혼" (0) | 2012.03.22 |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9 "각자이게 주어진 대로"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7 "온전케 하시는 주를 따라"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6 "우주적 그리스도"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5 "전이轉移의 감격"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7
온전케 하시는 주를 따라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람은 약속된 복락에 대해 확실하고도 안전한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시대적 여건 때문에 이러한 영광에 동참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라 해서 덕을 닦을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大 레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려는 마음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우리를 흔들려는 그 무엇으로부터 절연한 결단과 참여의 시기인 것은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그분께서 우리 삶의 모법母法 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태가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은 이 세상의 어떠한 법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도리어 모든 법을 준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법을 준수하지만 그 법에 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법이 주는 구원의 자유함을 누리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법에 역행하지 않도록 주시하며 깨어 있어야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세상 속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맞서 싸웠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어왔습니다. 가렴주구苛斂誅求의 독재에 저항하며 온 몸으로 싸웠던 이들도 있고, 선교를 위한 피의 제사를 드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순한 섬김의 정신으로 살다가 그들과 함께 생을 마감한 이들이 있었고, 일상속에서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준행함으로써 세상 속에 큰 빛이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수없이 많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이들을 떠올릴 때면, 우리는 한없이 벅차오르는 숭고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처럼 제자로서의 반열에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그러한 삶을 가능케했던 그들의 불꽃같은 정신을 흠모하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와 무엇이 다르기에 그토록 아름다운 인생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특별한 조건이라도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될 때마다 생각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버리곤 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라는 자책 아닌 자책을 던지면서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들기를 주저하며 옴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분명한 한 가지 의식이 깊이 새겨질 수 있다면, 그들은 단순히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 ‘가능태’로 맞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식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포기에서 시작된다’ 는 진리말고 또 무엇일까요.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선 현란한 마음을 비우고 오직 그리스도로만으로 채워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면 우리 안에 태초에 불었던 바람이 불것이고, 그 바람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일러주실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섣부르거나 무모한 행동이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포기는 ‘진정한 자기애’에서 비롯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지 않고서 자기포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수사 안셀름 그륀Anselm Grün이 지적한 것처럼, “참 고행은 육신을 업신여기는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된다“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길이 외롭고 척박하지만은 않을 것은 그 길은 그 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었고, 이미 그 길을 따라 간 수많은 이들의 발자욱이 이정표가 되어 주고 있음이며, 먼저 간 이들이 젯밥이 아닌 소담한 성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소담한 성찬위에 손을 얹고, 함께 아팠던 상처를 나누면서 잔잔하고도 진한 기쁨의 찬미를 부를 수 있도록 길을 걷는 우리의 마음이 올곧게 자라나야 하겠습니다.
■■■■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리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 멀리 있기 / 유안진 -
■■■■
<2004.03.30>
'Spiritual Writing2(2004-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9 "각자이게 주어진 대로" (0) | 2012.03.22 |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8 "기도하는 마음"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6 "우주적 그리스도"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5 "전이轉移의 감격" (0) | 2012.03.22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4 "자기 비움과 자기 십자가" (0) | 2012.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