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5
전이轉移의 감격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어떤 장애가 있다하더라도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늘 선에 부합하려는 원의를 갖는데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애긍을 하는 데는 부유하고 풍족한 이들뿐만 아니라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도 각자 해야 할 자기 몪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재력에 있어서는 똑같지 않을지라도 그 마음의 애정은 같을 수 있습니다. <大 레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의 빛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 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그 어떤 조건으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자비를 구하는 이들에게 투명한 수정그늘로 골고루 내려 앉으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불공평하다 생각하고 있다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을 먼저 의심해 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불공평하다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비를 무엇이라 정의하고 있을까요? 혹 우리가 정의한 자비가 올바른 것이라면, 불공평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 중에는 ‘불공평’이나 ‘불평등’이 존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불공평하다’는 명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끝내 공평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충분히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거나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타인과의 불충분한 형제애로 인해, 비교 우위를 점령하려는 마음이 있는건 아닐까요. 자족하는 마음이 부족하여서 세상의 띠끌을 끝없이 모아 채우려는 마음은 아닐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봅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조건으로 인해 외관상 불평등해 보이는 현상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이 이데아Idea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본질이 성숙하지 못한채로 드러나는 것일수도 있고, 반대로 어떠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상은 본질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권세있는 유대인들은 그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 조급한 판단을 내리고 말았지만, 우리 주님은 아파하는 이들의 현상 이면을 들여다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이 현상을 일그러뜨리는 또다른 요인이 됨을 알지 못하고, 조악한 속내를 비추고 말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아픈 영혼에게 더욱 더 절절한 하나님의 빛이 스며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로서는 모든 존엄한 존재들의 존엄성을 말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 수녀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따로 구별하지 않으셨던 주님처럼, 사랑하는 만큼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우리네 삶에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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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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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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