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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6
우주적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두 가지 본성 은 한 위격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한 주님으로서 종의 조건을 받아들이신 것은 어떤 필연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애심 때문이었습니다. <大 레오>
사순절이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고난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2천년전 그분의 죽음은 오늘을 살아나가는 형제자매들의 마음에 생생히 재연되어서 그분의 아픔과 고통을 마음으로나마 공감하여 헛된 우리의 모습을 자정하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말로다 할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끝까지 용서와 자비의 마음을 잃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참 인간 의 울부짖음이었고, 참 인간의 절망임에 분명합니다. 오늘도 그분의 죽음 앞에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은 십자가는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사랑과 자비의 절정이었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을 그대로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분은 하나님 이라 불렀습니다. 아니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고서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나오는 신성은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다스리는 초자연적인 능력 이상이기에, 그러한 존재자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신적 존재자’로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하늘 / 땅 / 땅속’이라는 삼층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파악될 수 있는 저 하늘 어딘가에 천상의 존재들이 존재한다 믿었고, 그 천상의 존재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토론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세계관에 살고 있던 예수님 또한 시대적인 제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오늘날 인간의 과학적 결과물들을 상상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은 2천년 전에만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에도 유의미하기엔 과학적 진보가 너무 많이 앞서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예수께서 신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겠느냐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라는 역사적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고백적 언명을 함께 붙여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vere Deus vere Homo이라 했던 고대 그리스도교에서 합의된 결론을 단순한 차원에서 동어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은 경직된 고백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류에게도 시공을 초월하여 생생히 살아있는 고백 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유대인들이 지구를 만드신 하나님을 창세기에서 고백했다면, 변화된 우주론에 입각한 우리로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보다 더 광대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층적 세계관에 살고 있었던 고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 인간, 참 하나님’이라 불렀다면, 이 작고 아름다운 푸른 점은 훨씬 더 광대한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분을 ‘우주적 그리스도’ 라고 달리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2천년전 유대땅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고, 육안으로 파악할 수 없는 미세한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마이크로 코스모스 안에도 코페르니쿠스, 브르노, 그리고 갈릴레오의 관심이었던 광활한 매크로 코스모스 넘어에도 분명 다차원의 신비로서 존재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고백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는 그 옛날 유대땅 백성들에 의해 소개된 그리스도를 훌쩍 뛰어 넘습니다. 우리와 만나시는 그분은 적색 구원의 은총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찬연한 은총으로 새로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의미의 정점엔 육신을 입고 오셨고, 발을 씻기셨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겸손과 자비가 언제나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적 그리스도로 인해 받은 구원의 빛깔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선명하고 신신한 향기를 내며 그 향기로 숨쉬고 살아있으라는 정언명령을 주십니다.
■■■■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10-11절]
■■■■
<200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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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5
전이轉移의 감격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어떤 장애가 있다하더라도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늘 선에 부합하려는 원의를 갖는데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애긍을 하는 데는 부유하고 풍족한 이들뿐만 아니라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도 각자 해야 할 자기 몪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재력에 있어서는 똑같지 않을지라도 그 마음의 애정은 같을 수 있습니다. <大 레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의 빛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 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그 어떤 조건으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자비를 구하는 이들에게 투명한 수정그늘로 골고루 내려 앉으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불공평하다 생각하고 있다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을 먼저 의심해 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불공평하다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비를 무엇이라 정의하고 있을까요? 혹 우리가 정의한 자비가 올바른 것이라면, 불공평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 중에는 ‘불공평’이나 ‘불평등’이 존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불공평하다’는 명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끝내 공평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충분히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거나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타인과의 불충분한 형제애로 인해, 비교 우위를 점령하려는 마음이 있는건 아닐까요. 자족하는 마음이 부족하여서 세상의 띠끌을 끝없이 모아 채우려는 마음은 아닐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봅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조건으로 인해 외관상 불평등해 보이는 현상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이 이데아Idea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본질이 성숙하지 못한채로 드러나는 것일수도 있고, 반대로 어떠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상은 본질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권세있는 유대인들은 그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 조급한 판단을 내리고 말았지만, 우리 주님은 아파하는 이들의 현상 이면을 들여다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이 현상을 일그러뜨리는 또다른 요인이 됨을 알지 못하고, 조악한 속내를 비추고 말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아픈 영혼에게 더욱 더 절절한 하나님의 빛이 스며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로서는 모든 존엄한 존재들의 존엄성을 말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 수녀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따로 구별하지 않으셨던 주님처럼, 사랑하는 만큼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우리네 삶에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
<200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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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비움과 자기 십자가
인자하고 양순한 마음은 또한 관대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이 자기 창조주를 본받는 것 보다 더 합당한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능력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이행해야 합니다. <大 레오>
예수께서는 이제 곧 수난받으실 것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많은 신앙인들에게 버겨운 무게가 되어 주님을 따라 가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저역시 예외가 아닌 것은, 주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유약한 마음새를 다잡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무지했고 주님과 저 자신을 속이는 모습에 치를 떨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나 그런 마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싶은 생각으로 골몰해지기도 하지만,
주님을 따라가려는 제자에로의 결심은 아직도 미궁속에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듯 합니다.
파심중적난破心中敵難이라 하여 마음 속의 도적을 잡기가 제일 힘들다고 했나요? 예수께서 ‘따라오는’ 조건으로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의 먼지가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을 가리고자 언제든 들어올 수 있음을 매순간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학적 강박증이 아니라 그것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추동drive이기에 하신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것은 그리스도 영靈의 속성이 [자기비움]κενοσις 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분이 그 속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심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되고 모든 피조물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은 [자기 비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 를 지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지라고 하시지 않고, 다른 이들의 십자가를 지라하시지 않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 개개인에게 다채로운 형상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천편일률적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이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를 엿보고 섣불리 따라하려는 모습이 그릇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도리어 축제의 기쁨이 아닐까요? 그것은 무거운 짐에 눌려 수동적으로 세상을 살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고유한 색깔의 향연’ 을 시작하라는 적극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도 죽음의 십자가였으나 부활의 십자가였지 않았습니까.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 힘써 행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장엄한 교향곡의 한 파트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애를 나누며 함께 동참하는 이 아름다운 대서사시에서 나는 무엇을, 그리고 언제 연주해야하는지를 알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비움]과 [자기 십자가]는 필요충분 조건이 됩니다.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창조주의 푸른 지휘봉이 가리키고 있는 은총의 새벽 을 보기 위해서는 뻣세고 조민躁悶한 마음이 아닌 텅 빈채로 계신 그분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
[빌립보서 2장 13-15절]
■■■■
<200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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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사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성을 그들과 함께 지니고 있으며, 육적 기원의 관점에서나 영적 출생의 관점에서나 그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으로 성화하였고, 같은 믿음으로 살고 있으며, 같은 성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치를 무시하지 말고, 이 친교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이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이전에, 우리가 그들과 함께 같은 한 분의 주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大 레오>
보통 [사회] 와 [공동체] 는 특별한 구분이 없이 사용되지만, 엄밀히 보면 전혀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사회’와 ‘공동체’를 처음으로 구분한 것은 근대 독일 사회학자 퇴니스Ferdinad Tönis 입니다.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사회society를 독일어 ‘게젤샤프트’Gesellschaft 로 표기하였고, 공동체community를 독일어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라고 표기하였습니다. 퇴니스에 의하면, 공동체는 오랜 시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립된 것으로 공통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준행하는 관습, 도덕, 종교, 전통 등이 존재하고, 그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며 사는 집단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회는 이것과는 전연 별개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는 가치 아래에서 그것을 목표로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법 규제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는 개인주의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합법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지지만, [공동체]는 개인주의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같은 가치아래 연대와 일치를 추구하며 존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공동체일까요 아니면 사회일까요?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공동체일까요 아니면 사회로서 존재하고 있을까요? 요즘 들어 더더욱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공동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큰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입버릇처럼 우리 모두가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 오늘날의 교회는 ‘개교회중심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철저히 사회성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누누이 들어왔듯이 오늘날 지구촌은 20:80의 세상입니다. 또한 엊그제 뉴스의 보도는 국민 5%가 토지의 50%를 소유하고 있다 말합니다. 예전에 제가 ‘사회비평의 중견 테러리스트’라 평했던 홍세화씨가 거듭 지적해왔듯이 대한민국은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공화국’이기를 포기했던 역사였습니다. 국민소득의 상승은 가난한 이들의 숫자에 정비례해왔으며, 고도화된 위험 요소들로 인해서 근대화는 담벼락 높이와 정비례해왔습니다.
어느 교회 목회자는 십일조 헌금을 수백만원 한다지요? 저로써는 정말 믿기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큰교회/작은교회'라는 구분이 있을까 궁금할 정도로 한국 교회는 이러한 구분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교회도 '많이 번만큼 많이 쓴다'는 세상적인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인 것은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대한민국은 그리고 한국 교회는 공동체인가요 사회인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은 공동체인가요 사회인가요? 두말할 필요없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공동체로서의 참 모습을 지니고 살라고 ‘나’가 아닌 ‘우리’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개인의 행복과 이익에 따라 필요에 의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상호침투"pericoresis 하시는 삼위일체로서 존재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네 삶도 따로 떨어진 개체로서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 안에서 한데 어울림을 이루고 살면 좋겠습니다.
■■■■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빌립보서 2장1-2절]
■■■■
<200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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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두가지 은총
이 시기에 악마의 일들을 멸하는 저 신비에서 동떨어진 채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온 교회가 죄사함을 받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빠스카 축제의 특성입니다. 이 죄사함은 성스런 세례로 새로 태어나는 이들뿐만 아니라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양자의 몫에 든 이들에게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재생의 목욕 입니다. 그렇지만 사멸할 인간 본성에 붙어 있는 녹綠을 제거하기 위해 매일 자신을 쇄신하는 일은 모든 이에게 과제로 남아 있으며, 또 성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항상 더 개선되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구원의 날에 옛 악습들을 그대로 지닌 채로 나타나지 않도록 모두 힘써야 합니다. <大 레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지녀야할 가장 큰 의식은 이후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겠다” 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교제κοινονια란 단순한 유희를 공유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귐을 뜻합니다. 특별히 세례는 그 자신의 결단임과 동시에 공동체의 결단입니다. 세례 받는 이들은 그동안 준비했던 자신의 신앙적 결단을 통하여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고 공동체는 새로이 들어오는 신자를 감격스럽게 맞이하여 이후로는 그와 함께 죽어도 좋다는, 다시말하면, 그와 그들은 이제 공생共生이며 공사共死의 관계가 됨을 의미합니다. 알베르 까뮈 가 그의 책 [오해]의 말미에 “아무도 없는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라고 한 말을 생각해 볼때,
세례 받은 이들은 이제 서로에게 ‘존재해 줌’으로써 서로를 살려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폭압적이며 살인적인 핍박이 행해지던 때였음을 생각해보면, 그 세례의 현장은 얼마나 비장했고,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그 누구라할지라도 쉽게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되는 핍박의 상황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요 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총에 버금가는 또 다른 은총일 것입니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발발했던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홍위병이 교회의 문을 폐쇄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리 가 버려. 이제 교회는 없어!” 그 말을 들은 한 소년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무슨 소리에요. 이제 교회가 없다니요? 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 소년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례를 받은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로 그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또 하나의 교회가 되어 그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해방의 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의 은총은 또한 해방의 은총입니다. 인간을 구속하는 그 어떤 세력이라할지라도 그를 묶어 놓을 수 없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그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담대할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준비하는 이 사순절에 깨달아야 할 두가지 은총은 공동체로서의 은총 이며, 해방의 은총 입니다. 공동체로서의 은총을 사는 우리들은 서로의 조력자가 되주어서 연약할 수 밖에 없는 피차간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겠습니다. 또한 악한 기운은 다른 곳에서 우리를 공략하는 것이아니라, 바로 우리의 본성에 촉수를 뻗치려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해방되어야 하는 대상 가운데 가장 으뜸은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나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6장8-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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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길의 걸림돌
우리가 가장 거룩한 신비를 거행해야 하며, 사십 일 동안 절제하여 빠스카 축제를 잘 준비하도록 성령께서 그리스도 백성에게 합당한 가르침을 주시는 이때에, 악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거슬러 더 폭악하게 날뜁니다. 정화의 이러한 이유는 구원에 유익한 규범을 준수하도록 우리를 이미 초대 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제시된 속죄생활을 열심히 하도록 지시해 줍니다. 사실 이 날들을 더욱 거룩하게 지낸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빠스카를 더 경건하게 공경했음을 입증합니다. <大 레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악마가 하는 일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악마의 일은 ‘because'에 한치 벗나남이 없이 귀속되지만, 하나님의 일은 because를 가로지름과 동시에 inspite of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악마가 하는 일은 우리 눈 앞에 인과응보의 원리에만 해당되어 펼쳐지지만,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인식으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견인하십니다. 악마에게는 ‘여백의 여유’가 없기에, 역설paradox의 미를 펼치시는 하나님 앞에 자멸하고 맙니다. 세상의 논리적 사고를 넘어선 하나님의 방식은 차마 신비 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설의 공간은 인간이나 악마가 헤아릴 수 없는 우주적 깊음입니다. 이러한 대적할 수 없는 광활한 하나님의 권세로 인해 악마는 결국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패전의 징조를 스스로 예감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괴성으로 자신의 존재만이라도 드러내 보이려 할 것입니다.
사순절의 때는 하나님 구원의 신비가 절정에 다다르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의 마지막 고함을 들을 수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 때에는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붙잡고자 손을 내어 뻗었던 혈루증 여인의 믿음 처럼, 그분과의 접촉으로 인해 구원의 흐름이 전이되고 완성된다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혈루증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고자 그 앞에 나아오는 동안
방해하는 뭇 사람들로 인하여 이리 채이고 저리 채였을 것이지만, 그녀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여 사력을 다해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리고 자비로 넘치는 그분의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에 구원의 신비는 그녀를 감싸고 있는 악의 굴레에서 그녀를 견인해 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가 주님에게로 다가서는 순간은 구원을 위한 길임과 동시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의 절정이었습니다. 평시 가만 놔두었던 사람들도 그때는 길을 막아 서서 팔을 비틀어 채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에 들끓었던 좌절과 포기의 속삭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거칠고 힘겨운 걸음을 계속 이어나갔던 것입니다. 사람들 머리 사이로 가물거리는 주님의 형상이 보였을 때 그녀는 더더욱 힘을 내었을 것입니다.
모리스 젱델 은 “악은 우리를 물질세계의 물질로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악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한 성화의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막아서며 그저 감겨진 태엽처럼 한시적으로 풀리는 짜릿함에 만족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사순절을 사는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순간이 아닌 영원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하심으로 구원의 신비를 지금 이순간에도 체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딛는 발걸음을 한층 더 무겁게 하는 진흙발일지라도, 더디어도 발을 묶어 세우지 않고 줄곧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아 나선 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초대해 주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 가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13-15a절] ■■■■
<200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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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자비의 길
아무쪼록 우리가 그분 영광의 영예를 누릴 수 있으려면 우리 안에 자비와 진리가 자리잡게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구원하실 사람들에게 자비와 진리의 길 을 통해 오셨으니, 구원받을 사람들도 이 길을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께 달려가야 합니다. 진리는 자비 안에서 성장하는가 하면, 자비는 진리 안에서 전진합니다. 진리에 역행하는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거리가 먼 사람은 의義를 행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덕을 넉넉히 지니지 못한 사람은 둘 다 실천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믿음의 힘이 되며, 믿음은 사랑의 힘이 됩니다. 이 둘이 서로 불가분의 결합으로 맺어 있을 때, 둘 다 그 명칭에 참으로 부합되며 알찬 결실을 맺게 됩니다. <大 레오>
유대 제사장들은 ‘유용한 제물’을 가져오는 자에 한하여 죄사함을 말하였고, 세례자 요한은 그 어떤 제물이 아닌, ‘물’로 우리의 죄가 씻어질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물이나 물의 도움을 얻지 않아도, 성전이나 요단강에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혹시 그들이 모르지나 않을까 싶으셨는지, 사람들이 있는 곳곳마다 다니시면서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말을 건네시며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박한 옷고름 마다 구원의 얼굴로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유대 제사장들은 ‘유용한 제물’을 가져오지 않는 자들을 ‘죄인’이라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것 없어 노숙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조건과 단서를 그리고 공식을 강요하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값없이 와서 먹고 마실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과 눈으로 그리고 삶으로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말로 다 할 수 없기에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수만가지의 언사로 묶여진 조항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은 진리는 이성Vernunft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만나셨을 때 그를 ‘민망히 여겼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희랍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의 명사형 ‘스플랑크나’σπλαγχνα는 본래 우리 몸속 ‘내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병을 앓고 있는 그의 현상만을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진리의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장로들의 강제에 의해,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저 앞에서부터 ‘나는 더럽습니다’ 소리치며 다녀야 했고, 사람과 한데 섞여 살 수없어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 살아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언제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옴두꺼비처럼 살았던 그가 예수의 구원의 소리를 듣고서 무리를 헤쳐나와 엎드린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환자의 지난至難한 역사를 읽으셨던 것입니다. 말 그대로 어려움의 극치를 온통 겪으며 살았던 그를 보시고 예수님의 ‘내장’σπλαγχνα은 요동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악한 고통을 표현하기를 ‘단장’斷腸이라 하였듯이 그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애닳다 못해 사명할 지경에 이를 듯 하셨나봅니다.
우리 주님의 구원은 진리와 자비입니다. 진리와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비를 떠난 경색된 진리 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이, 진리를 떠난 모호한 자비 는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자비로 오셨듯이, 길을 걷는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충만해야겠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 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베소서 4장 21-24절, 31-32절]
■■■■
<200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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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9 "Peace-Maker, many peace-keepers"
| Spiritual Writing2(2004-2007) 2012. 3. 22. 05:30Peace-Maker, many peace-keepers
주님은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불목과 증오와 싸움을 그만둡시다. 형제적 평화를 되찾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빠스카 축제에 동참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십시오. 형제들과 사랑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지존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의 숫자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大 레오>
20세기에 들어서 천만명 이상의 희상자를 낳은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한번은 러시아 정부의 공산혁명을 위해 희생 당한 2천만명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번은 나찌에 의해 희생당한 1천만명의 유태인과 집시들이었습니다. 동물 행동학자인 콘라드 로렌츠 는 이처럼 인간이 자행한 대량 살인의 잔인성은 동물의 공격적인 본능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합니다. '무기'라는 치명적인 판도라의 상자가 인류에게 열려진 후로 기저基底에 있던 조악한 광폭함은 거침없이 사람들 사이를 질주하여서 인간이 어떻게 비인간화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 의 지적처럼 인류 역사는 '침략의 역사'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의 주역들을 염오厭惡하는 비판가들의 등장을 두려워 한 나머지 역사는 공공연하게나 사밀하게나 철저히 합리화되어지곤 했습니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 숨겨진 자신의 파괴성에 눈을 뜨지 못했고, 그것은 집단 무의식이 되어, 광기로, 인면수심으로 드러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총체적 죽음과 죽임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에도 또렷한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어둡게 휘감아 덮는 사악한 커튼을 활짝 열어 보임으로써 어두운 세상을 그대로 인정하려했던 뭇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섣부른 이익을 챙기려 했던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으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주저하는 이들에게 분명한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화를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팍스 로마나Pax-Romana, 팍스 어메리카나Pax-Americana가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순전한 평화(Ειρενη, 에이레네)였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평화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때에 비로소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나는 당신의 소금입니다.
항상 짜게 남아 있으려니 쓰라림을 참아야 하고
그래서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해인 詩 “소금호수에서”]
이는 평화는 나약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순간적인 감상이 아니라, 도리어 뼈를 깎는 투쟁과 고통 속에서만 비로소 피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God is Peace-maker.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이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We are many peace-keepers. 하나님께서 평화를 대신 지켜주십사 바라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청지기로서 우리가 자존적 존재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은혜에 反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그 은혜를 거스리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또한 그런 이들을 향하는 우리의 조급한 시선이 형제애를 방해하는 구차한 악의 모양을 빚지 않도록 우리 자신이 먼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평화가 되어야겠습니다.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장 4-5절]
■■■■
<200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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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성화합시다
그러므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주님의 거룩한 부활 축일을 합당한 수계守誡 생활로 지내기 위하여 우리 모든 신자들은 마음을 성화합시다. 가혹함을 유순하게 하고, 화를 가라앉히며, 모든 잘못을 서로 용서해 주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복수를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고백한 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아주 견고한 사슬로 묶어두게 될 것입니다. <大 레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관용’ 과 ‘법준수’ 의 문제는 많은 점에서 부딪혀왔습니다. 관용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법준수’란 가장 초보적인 차원의 도덕심이며 그것은 언제나 관용을 침해해왔던 하나의 ‘잣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반면에 법준수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관용’이란 공공의 이익을 생각지 못하는 사사로움이며, 근본을 흔들 위험이 있는 철없는 연약함에 불과한 것이라 평가합니다. 이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것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사회는 혼란해지기도, 강팍해지기도 했던 것을 역사는 누누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일본 조지대학 법철학 교수였던 독일 욤파르트 교수 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수십년전 스페인의 어떤 교도소에서 죄수들의 폭동이 일어나 교도소장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때 그 폭동을 말렸던 사람은 그 교도소에서 가장 잔인하기로 소문난 ‘늑대’라는 별명의 죄수였는데, 이 죄수는 훗날 교도소장을 죽이려드는 죄수들을 말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난 특별히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장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소장을 죽이고도 싶었던 내가 아닌가? 그러나..... 그때 소장의 아들을 생각하였다. 그 아이가 고아가 되는 것은 싫었다. 나는 그 아이로부터 일생 처음으로 사랑의 표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사랑을 준 것은 그 아이 뿐이었다“
이 아이가 준 ‘사랑의 표시’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직장에 놀러왔던 그 천진난만한 소년이 그 ‘늑대’라는 죄수에게 천사의 키스를 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맑은 눈빛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서슴없는 사랑의 행동은 ‘늑대’라는 별명으로 악명 높았던 그에게 다가서서 키스함으로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고, ‘늑대’가 좋은 일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관용이나 법준수를 뛰어넘어 좋은 것으로 되돌아 옵니다. 관용에는 조건이 있고, 법준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사랑에는 조건도 있지 않으며, 정해진 한계도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채로 끝없다’ 말할 뿐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천진한 아이의 작은 행동이 질서와 도덕을 지키는 동기를 부여한 것입니다.
大 레오 는 용서를 위하여 ‘마음을 성화합시다’라고 제안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일상속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조회照會해보자는 권면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성화의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니기에, 용서를 가능케하는 사랑은 일순간 이루어지지 않고,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나가야 함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당위’Sollen 로 읽어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매순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뽑아 주신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애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 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장 12-15절a]
■■■■
<200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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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적 권고의 의미
우리 각자의 양심이 밝혀지지 않으리라는 망상을 자신에게 주입시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밀스런 장소나 벽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을 동시에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최고 판관이신 하나님의 인식이 이러하니 그분의 시선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은 견고한 것이라도 모두 꿰뚫어보시며, 비밀스런 것이라도 모두 밝혀내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두운 것들이 빛을 발하며, 말할 줄 모르는 것들도 대답하며, 침묵을 지키는 것들도 고백하고, 정신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도 말합니다. <大 레오>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은 상호신뢰입니다. 진정한 상호신뢰 속에서 나누는 사귐은 무엇을 꺼내 놓지 않더라도 눈빛 하나로 가슴빛을 읽어내는 통교通交입니다. 이러한 사귐은 혼탁함을 나누기도 하고 마음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나누기도 하며, 때로는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허물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마음이며,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의 모습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상호-신뢰’라고 말한바, ‘신뢰’란 본질적으로 ‘상호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호신뢰가 없는 관계는 서로간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 상대를 평가할 뿐, 그/녀와 마음을 나누거나 진솔한 언어로 삶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감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라시오Horacio 의 오랜 유럽 격언처럼 우리가 자기의 성질을 배제하면 할수록,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 사이에도 이러할진데,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생각의 선線을, 그리고 마음의 선을 긋고 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의 선’ 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의 이성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마음의 선’ 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분을 내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외면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행이 생각의 선을 지운 삶일지라도, 마음의 선이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면 ‘친밀한 하나님 경험’ 대신에, 밖에 계신 ‘특별한 하나님 경험’으로만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고대 황제나, 신화적 신들을 떠받들 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의 선을 넘어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받들고, 그와의 친밀한 사랑김이 내뿜어지는 것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그리고 부부사이에 있어서 맹목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문제인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그리고 大 레오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과 불안과 지기 확신이 없는 우리의 조각난 마음을 맞추고자 이미 선을 넘어오신 그분을 맞아들이라는 영적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 들입니다.
[로마서 9장22-24절]
■■■■
<200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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