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0
진리와 자비의 길


아무쪼록 우리가 그분 영광의 영예를 누릴 수 있으려면 우리 안에 자비와 진리가 자리잡게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구원하실 사람들에게
자비와 진리의 길 을 통해 오셨으니, 구원받을 사람들도 이 길을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께 달려가야 합니다. 진리는 자비 안에서 성장하는가 하면, 자비는 진리 안에서 전진합니다. 진리에 역행하는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거리가 먼 사람은 의義를 행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덕을 넉넉히 지니지 못한 사람은 둘 다 실천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믿음의 힘이 되며, 믿음은 사랑의 힘이 됩니다. 이 둘이 서로 불가분의 결합으로 맺어 있을 때, 둘 다 그 명칭에 참으로 부합되며 알찬 결실을 맺게 됩니다. <大 레오>


유대 제사장들은 ‘유용한 제물’을 가져오는 자에 한하여 죄사함을 말하였고, 세례자 요한은 그 어떤 제물이 아닌, ‘물’로 우리의 죄가 씻어질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물이나 물의 도움을 얻지 않아도, 성전이나 요단강에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혹시 그들이 모르지나 않을까 싶으셨는지, 사람들이 있는 곳곳마다 다니시면서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말을 건네시며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박한 옷고름 마다 구원의 얼굴로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유대 제사장들은 ‘유용한 제물’을 가져오지 않는 자들을 ‘죄인’이라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것 없어 노숙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조건과 단서를 그리고 공식을 강요하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값없이 와서 먹고 마실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과 눈으로 그리고 삶으로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말로 다 할 수 없기에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수만가지의 언사로 묶여진 조항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은 진리는 이성Vernunft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만나셨을 때 그를 ‘민망히 여겼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희랍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의 명사형 ‘스플랑크나’σπλαγχνα는 본래 우리 몸속 ‘내장’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병을 앓고 있는 그의 현상만을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진리의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장로들의 강제에 의해,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저 앞에서부터 ‘나는 더럽습니다’ 소리치며 다녀야 했고, 사람과 한데 섞여 살 수없어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 살아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언제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옴두꺼비처럼 살았던 그가 예수의 구원의 소리를 듣고서 무리를 헤쳐나와 엎드린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환자의 지난至難한 역사를 읽으셨던 것입니다. 말 그대로 어려움의 극치를 온통 겪으며 살았던 그를 보시고 예수님의 ‘내장’σπλαγχνα은 요동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악한 고통을 표현하기를 ‘단장’斷腸이라 하였듯이 그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은 애닳다 못해 사명할 지경에 이를 듯 하셨나봅니다.

우리 주님의 구원은 진리와 자비입니다. 진리와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비를 떠난
경색된 진리
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이, 진리를 떠난 모호한 자비 는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자비로 오셨듯이, 길을 걷는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충만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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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 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베소서 4장 21-24절, 31-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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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0>
And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9
Peace-Maker, many peace-keepers


주님은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불목과 증오와 싸움을 그만둡시다. 형제적 평화를 되찾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빠스카 축제에 동참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십시오. 형제들과 사랑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지존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의 숫자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大 레오>


20세기에 들어서 천만명 이상의 희상자를 낳은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한번은 러시아 정부의 공산혁명을 위해 희생 당한 2천만명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번은 나찌에 의해 희생당한 1천만명의 유태인과 집시들이었습니다. 동물 행동학자인
콘라드 로렌츠 는 이처럼 인간이 자행한 대량 살인의 잔인성은 동물의 공격적인 본능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합니다. '무기'라는 치명적인 판도라의 상자가 인류에게 열려진 후로 기저基底에 있던 조악한 광폭함은 거침없이 사람들 사이를 질주하여서 인간이 어떻게 비인간화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 의 지적처럼 인류 역사는 '침략의 역사'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의 주역들을 염오厭惡하는 비판가들의 등장을 두려워 한 나머지 역사는 공공연하게나 사밀하게나 철저히 합리화되어지곤 했습니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 숨겨진 자신의 파괴성에 눈을 뜨지 못했고, 그것은 집단 무의식이 되어, 광기로, 인면수심으로 드러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총체적 죽음과 죽임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에도 또렷한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어둡게 휘감아 덮는 사악한 커튼을 활짝 열어 보임으로써 어두운 세상을 그대로 인정하려했던 뭇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섣부른 이익을 챙기려 했던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으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주저하는 이들에게 분명한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화를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팍스 로마나Pax-Romana, 팍스 어메리카나Pax-Americana가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순전한 평화(Ειρενη, 에이레네)였습니다
.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평화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때에 비로소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나는 당신의 소금입니다.
항상 짜게 남아 있으려니 쓰라림을 참아야 하고
그래서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해인 詩 “소금호수에서”]


이는 평화는 나약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순간적인 감상이 아니라, 도리어 뼈를 깎는 투쟁과 고통 속에서만 비로소 피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God is Peace-maker.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이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We are many peace-keepers. 하나님께서 평화를 대신 지켜주십사 바라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청지기로서 우리가 자존적 존재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은혜에 反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그 은혜를 거스리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또한 그런 이들을 향하는 우리의 조급한 시선이 형제애를 방해하는 구차한 악의 모양을 빚지 않도록 우리 자신이 먼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평화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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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장 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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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9>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