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8
마음을 성화합시다
그러므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주님의 거룩한 부활 축일을 합당한 수계守誡 생활로 지내기 위하여 우리 모든 신자들은 마음을 성화합시다. 가혹함을 유순하게 하고, 화를 가라앉히며, 모든 잘못을 서로 용서해 주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복수를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고백한 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아주 견고한 사슬로 묶어두게 될 것입니다. <大 레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관용’ 과 ‘법준수’ 의 문제는 많은 점에서 부딪혀왔습니다. 관용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법준수’란 가장 초보적인 차원의 도덕심이며 그것은 언제나 관용을 침해해왔던 하나의 ‘잣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반면에 법준수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관용’이란 공공의 이익을 생각지 못하는 사사로움이며, 근본을 흔들 위험이 있는 철없는 연약함에 불과한 것이라 평가합니다. 이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것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사회는 혼란해지기도, 강팍해지기도 했던 것을 역사는 누누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일본 조지대학 법철학 교수였던 독일 욤파르트 교수 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수십년전 스페인의 어떤 교도소에서 죄수들의 폭동이 일어나 교도소장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때 그 폭동을 말렸던 사람은 그 교도소에서 가장 잔인하기로 소문난 ‘늑대’라는 별명의 죄수였는데, 이 죄수는 훗날 교도소장을 죽이려드는 죄수들을 말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난 특별히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장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소장을 죽이고도 싶었던 내가 아닌가? 그러나..... 그때 소장의 아들을 생각하였다. 그 아이가 고아가 되는 것은 싫었다. 나는 그 아이로부터 일생 처음으로 사랑의 표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사랑을 준 것은 그 아이 뿐이었다“
이 아이가 준 ‘사랑의 표시’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직장에 놀러왔던 그 천진난만한 소년이 그 ‘늑대’라는 죄수에게 천사의 키스를 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맑은 눈빛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서슴없는 사랑의 행동은 ‘늑대’라는 별명으로 악명 높았던 그에게 다가서서 키스함으로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고, ‘늑대’가 좋은 일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관용이나 법준수를 뛰어넘어 좋은 것으로 되돌아 옵니다. 관용에는 조건이 있고, 법준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사랑에는 조건도 있지 않으며, 정해진 한계도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채로 끝없다’ 말할 뿐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천진한 아이의 작은 행동이 질서와 도덕을 지키는 동기를 부여한 것입니다.
大 레오 는 용서를 위하여 ‘마음을 성화합시다’라고 제안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일상속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조회照會해보자는 권면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성화의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니기에, 용서를 가능케하는 사랑은 일순간 이루어지지 않고,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나가야 함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당위’Sollen 로 읽어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매순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뽑아 주신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애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 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장 12-15절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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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마음을 성화합시다
그러므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주님의 거룩한 부활 축일을 합당한 수계守誡 생활로 지내기 위하여 우리 모든 신자들은 마음을 성화합시다. 가혹함을 유순하게 하고, 화를 가라앉히며, 모든 잘못을 서로 용서해 주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복수를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고백한 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아주 견고한 사슬로 묶어두게 될 것입니다. <大 레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관용’ 과 ‘법준수’ 의 문제는 많은 점에서 부딪혀왔습니다. 관용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법준수’란 가장 초보적인 차원의 도덕심이며 그것은 언제나 관용을 침해해왔던 하나의 ‘잣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반면에 법준수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관용’이란 공공의 이익을 생각지 못하는 사사로움이며, 근본을 흔들 위험이 있는 철없는 연약함에 불과한 것이라 평가합니다. 이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것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사회는 혼란해지기도, 강팍해지기도 했던 것을 역사는 누누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일본 조지대학 법철학 교수였던 독일 욤파르트 교수 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수십년전 스페인의 어떤 교도소에서 죄수들의 폭동이 일어나 교도소장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때 그 폭동을 말렸던 사람은 그 교도소에서 가장 잔인하기로 소문난 ‘늑대’라는 별명의 죄수였는데, 이 죄수는 훗날 교도소장을 죽이려드는 죄수들을 말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난 특별히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장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소장을 죽이고도 싶었던 내가 아닌가? 그러나..... 그때 소장의 아들을 생각하였다. 그 아이가 고아가 되는 것은 싫었다. 나는 그 아이로부터 일생 처음으로 사랑의 표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사랑을 준 것은 그 아이 뿐이었다“
이 아이가 준 ‘사랑의 표시’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직장에 놀러왔던 그 천진난만한 소년이 그 ‘늑대’라는 죄수에게 천사의 키스를 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맑은 눈빛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서슴없는 사랑의 행동은 ‘늑대’라는 별명으로 악명 높았던 그에게 다가서서 키스함으로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고, ‘늑대’가 좋은 일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관용이나 법준수를 뛰어넘어 좋은 것으로 되돌아 옵니다. 관용에는 조건이 있고, 법준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사랑에는 조건도 있지 않으며, 정해진 한계도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채로 끝없다’ 말할 뿐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천진한 아이의 작은 행동이 질서와 도덕을 지키는 동기를 부여한 것입니다.
大 레오 는 용서를 위하여 ‘마음을 성화합시다’라고 제안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일상속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조회照會해보자는 권면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성화의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니기에, 용서를 가능케하는 사랑은 일순간 이루어지지 않고,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나가야 함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당위’Sollen 로 읽어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매순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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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뽑아 주신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애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 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장 12-15절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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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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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7
도적적 권고의 의미
우리 각자의 양심이 밝혀지지 않으리라는 망상을 자신에게 주입시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밀스런 장소나 벽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을 동시에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최고 판관이신 하나님의 인식이 이러하니 그분의 시선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은 견고한 것이라도 모두 꿰뚫어보시며, 비밀스런 것이라도 모두 밝혀내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두운 것들이 빛을 발하며, 말할 줄 모르는 것들도 대답하며, 침묵을 지키는 것들도 고백하고, 정신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도 말합니다. <大 레오>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은 상호신뢰입니다. 진정한 상호신뢰 속에서 나누는 사귐은 무엇을 꺼내 놓지 않더라도 눈빛 하나로 가슴빛을 읽어내는 통교通交입니다. 이러한 사귐은 혼탁함을 나누기도 하고 마음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나누기도 하며, 때로는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허물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마음이며,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의 모습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상호-신뢰’라고 말한바, ‘신뢰’란 본질적으로 ‘상호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호신뢰가 없는 관계는 서로간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 상대를 평가할 뿐, 그/녀와 마음을 나누거나 진솔한 언어로 삶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감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라시오Horacio 의 오랜 유럽 격언처럼 우리가 자기의 성질을 배제하면 할수록,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 사이에도 이러할진데,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생각의 선線을, 그리고 마음의 선을 긋고 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의 선’ 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의 이성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마음의 선’ 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분을 내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외면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행이 생각의 선을 지운 삶일지라도, 마음의 선이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면 ‘친밀한 하나님 경험’ 대신에, 밖에 계신 ‘특별한 하나님 경험’으로만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고대 황제나, 신화적 신들을 떠받들 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의 선을 넘어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받들고, 그와의 친밀한 사랑김이 내뿜어지는 것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그리고 부부사이에 있어서 맹목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문제인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그리고 大 레오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과 불안과 지기 확신이 없는 우리의 조각난 마음을 맞추고자 이미 선을 넘어오신 그분을 맞아들이라는 영적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 들입니다.
[로마서 9장22-24절]
■■■■
<2004.03.17>
도적적 권고의 의미
우리 각자의 양심이 밝혀지지 않으리라는 망상을 자신에게 주입시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밀스런 장소나 벽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을 동시에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최고 판관이신 하나님의 인식이 이러하니 그분의 시선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은 견고한 것이라도 모두 꿰뚫어보시며, 비밀스런 것이라도 모두 밝혀내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두운 것들이 빛을 발하며, 말할 줄 모르는 것들도 대답하며, 침묵을 지키는 것들도 고백하고, 정신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도 말합니다. <大 레오>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은 상호신뢰입니다. 진정한 상호신뢰 속에서 나누는 사귐은 무엇을 꺼내 놓지 않더라도 눈빛 하나로 가슴빛을 읽어내는 통교通交입니다. 이러한 사귐은 혼탁함을 나누기도 하고 마음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나누기도 하며, 때로는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허물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마음이며,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의 모습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상호-신뢰’라고 말한바, ‘신뢰’란 본질적으로 ‘상호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호신뢰가 없는 관계는 서로간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 상대를 평가할 뿐, 그/녀와 마음을 나누거나 진솔한 언어로 삶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감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라시오Horacio 의 오랜 유럽 격언처럼 우리가 자기의 성질을 배제하면 할수록,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 사이에도 이러할진데,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생각의 선線을, 그리고 마음의 선을 긋고 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의 선’ 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의 이성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마음의 선’ 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분을 내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외면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행이 생각의 선을 지운 삶일지라도, 마음의 선이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면 ‘친밀한 하나님 경험’ 대신에, 밖에 계신 ‘특별한 하나님 경험’으로만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고대 황제나, 신화적 신들을 떠받들 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의 선을 넘어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받들고, 그와의 친밀한 사랑김이 내뿜어지는 것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그리고 부부사이에 있어서 맹목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문제인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그리고 大 레오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과 불안과 지기 확신이 없는 우리의 조각난 마음을 맞추고자 이미 선을 넘어오신 그분을 맞아들이라는 영적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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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 들입니다.
[로마서 9장2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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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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