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그저 현실로

인간 예수는 실망으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실망에 대한 반응은 교훈적입니다.
그분은 결코 불평하지 않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의기소침해져서 일을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관계의 실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때로는 애정을 갖기도 하고 도와도 주지만
때로는 실망시키리라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비록 원한다 해도 사람들이 항상 이상적으로,
혹은 완벽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 랄프 라니에리 -


예수님처럼 영민하신 분이 또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가슴 따뜻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어리숙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결같은 자비와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무지와 옹색과 배신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로 인해서 마음 아파 하시면서 홀로 기도하셨던 모습이었지요.

예수님은 분명 마음이 여린 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속내를 다 드러내 보였던 분이기도 하고, 한번은 너무 어이없는 경우를 당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셨는지
주저 앉기도 하셨습니다. 언제 그랬냐구요? 마가복음 9장35절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네요. 한번 찾아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두 번째로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어서 가버나움 집 밖에서 그들은 서로 누가 제일 큰 제자인지를 놓고 쟁론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처음에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못들으셨나 봅니다. 아니 제자들을 오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3절에서 제자들에게
"토론‘[디아로기조마이]διαλογίξομαι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디아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
하였기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디아로기조마이]와 [디아레고마이]는 무슨 차이 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디아로기조마이]는 reflection, consider를 의미합니다. 즉 반성하고, 생각해보고, 곰곰이 따져 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다시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혹 반성하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놓고 반성하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디아레고마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speak out이나 confer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어떤 결론을 위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하는 이話者의 말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이
[자기 자신을 향해] 회개하고 반성하는 모습이기를 바랬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산에서의 무지한 모습,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던 무능한 모습, 그리고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무정물無情物과도 같은 모습을 뒤로하고서 누가 큰가 하는 것을 두고 쌈박질을 하는 무쇠낯짝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들은 직후에 벌어진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은 마치 돌아가시는 부모를 앞에 두고 상속 다툼을 벌이는 것에 버금갈만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제 곧 자신에게 닥칠 일로 인해 유언과도 같은 피빛 가르침으로 애쓰셨지만 제자들은 동상이몽으로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하릴없이 주저 앉으셨지만, 다시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나쁜 선생은 있어도 나쁜 제자는 없다”는 말을 주님이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주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προτος, 프로토스]가 되려면 끝[εσχατος, 에스카토스]이 되라고 천천히, 천천히 말씀하십니다.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다시금 친절히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자신을 좌절시키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이들까지도 품에 안아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현실로 그대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현실이 주는 피치 못할 좌절감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뜻 주시고 힘 주신 하나님의 길을 따라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모든 시간성을 아우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소유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으로
그 시간성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똑똑히 보셨던 주님은 송곳눈을 하고서 달려오는 현실의 굴레로부터 참 자유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200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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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증명하는 삶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철없고 부질없는 모험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통상적으로 이런 물음으로 골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철저히 구조화된 세상속에서 신의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제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판에 신의 존재를 구상하여 세상 구조에 대조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거꾸로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신뢰하고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소중하고도 가치롭게 여기는 그 무엇은 과연 얼마나 실증적이며 얼마나 검증된 것인가고 말입니다. 이것은 네거티브적 질문을 통해 반사논리를 얻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코웃음을 받기에 딱좋은 격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가치들이 실증적이지 못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모호하다’거나 ‘확실하지 않다’거나 혹은 ‘미신적이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해주는 원인原因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기도 버겨운 삶은 현상 이면의 것들에 전혀 무감각해져서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모든 것이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라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고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감히 머리 둘 곳에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끄 모노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우연’에 따라 우발적으로 일아나는 현상이라면,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혈연을 비롯한 갖가지 관계성들이 단순히 우연적 발생이라면, 그 속에서 윤리를 꺼낼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르또 에코가 “타자의 존재성 자체에서 윤리가 나올 수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며 심증적인 주장일뿐 그에 따른 실증적인 논거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형제나 부모에게 욕을 하든 살인을 하든 원리 원칙적으로는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어겼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뿐이지 그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임의적이며 형식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권위를 찾기는 힘듭니다. 흔히 말하듯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은 단지 유희적 언어로, 상황이나 문장에 어울리는 조미료같은 언어로서 작용할 수는 있어도 언어의 진정성에서는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심각한 오류는 그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근거가 현실 생활에서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아기적 발달에서 정지된 인간 상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단지 경험적 근거에만 의지하여) ‘희망’이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거나, 가장 극단적인 예로는 그들이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신의 존재만큼이나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인간 가치일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적 주장이 앞선 경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을 갖는 것도 논리적 적합성을 따져서 신앙을 선택하기 보다는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논리적이며 이성적 비판은 그 다음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감정적으로 싫은 것에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하나 하나는 다방면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어로써 역할합니다. 이미 어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사유체계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신적인 언어로써 역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 존재는 굳이 얕은 머리로 증명해 낼 필요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비판하거나 변증한다는 것은 어느 쪽에서건 충분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언어가 되어야겠습니다. 커다란 사전 한 페이지에 장식되어, 밑줄 긋고 또 읽어볼만한 단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단어가 동사이건 명사이건 혹은 다른 것이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200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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