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공동체의 기반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미움을 볼 때조차도 감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위에서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 헨리 나웬 -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
이 달을 보며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나 언제나 저 위에 떠 있는 분처럼 느끼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 멀리 떠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계신 걸까요. 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우리 세상 속에 갖혀 있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에 계시기만 한 것일까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필시 벌써 그 길에서 내려와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함께 길을 걷는 수없이 많은 도반들로 인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거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존재로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의 시험장소
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생몸살과도 같은 일들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성도들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성인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참 모습은 그런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여서 거룩의 위장술을 부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의식 차원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해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존재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성도聖徒가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아닌 존재들]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타인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데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하듯이, 아직-아닌 것을 지금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존재하는
‘우리’ 공동체
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 안에 생명의 지탱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타인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의 시험장에서 다져진 마음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달빛만을 내려 보내는 하늘의 저 달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머무시지 않고 우리 위에서 은총을 단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가 머리 위로, 그리고 우리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은 손이라는 국부적 영역에 비할데 없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로써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
인 것입니다. <200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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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비어 있음은 잉태의 공간이고, 모든 창조는 이 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이 비어 있음의 공간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맞는다. 마치 심연이나 영원으로의 차가운 추락.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위험한 부정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둘러싸인 영역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웨인 멀러 -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마당에 나와 문득 뒷산을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하늘 곳곳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과 둥근 달,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진 조령산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산의 밤공기와 풍경은 시각을 맑게 정제해주고 교정해주며 그 곳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정도로 매력적인 비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산에 혼자 올라 보려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홀로 성큼 들어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인데 오르려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라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
입니다. 산에 올라 자칫 산짐승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 발을 헛디뎌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에 오르는 두려움이 분명 이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경험이 없다는 구차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용기를 내볼 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웠을때 느끼는 해방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자 하는 그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비움으로 가능한 것들을 헤아려 볼 수는 있어도 정작 비우지는 못합니다. 이는 늘 채우려고만 발버둥치는 우리 삶의 구조로 인함이며, 채움으로만 만족해 왔던 과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됨 속에 살며 그릇됨을 방편으로 삼아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한시적 기쁨과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한정적 만족감, 이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른 가능성에로의 열린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수학을 모두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수세계의 다양함을 보고 싶은 이들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신비속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막연한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막연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으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고자 내딛는 첫 발은 불편한 우리의 믿음이 공고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막연하다’는 것은 도리어 ‘가능성’이며,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
이기 때문입니다. <200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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