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2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마니의 주장에 따라 주님께서 수난을 겪지 않았으니 그분에게 부활도 없었다고 하는가 하면,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 따라 말씀의 신성 자체가 수난받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거나 그리스도교 백성의 귀에 이것을 주입시키는 작태는 우리 종교의 기초를 뒤집어놓는 일이며, 하나님의 참 아들께서 동시에 사람의 참 아들이시라는 사실 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大 레오>
다시 한번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로마 병정들에게 얻어 맞으시면서 짐승처럼 끌려가서는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는 가운데 양손이 묶여진 채로 힘 없이 엎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은 태형을 시작합니다. 화면으로 보이는 병정이 들고 있는 채찍 끝에는 쇳조각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인들은 태형에 사용하는 채찍이 많게는 30-40 가닥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채찍 끝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쇳조각은 사람의 몸에 박혀 살점을 도려내고, 더 깊숙이 박힌 쇳조각은 잘 빠지지 않아 다시 힘을 주어 잡아 당겨서 빼내야 할 정도로, 사람에게 가하는 태형은 사형 집행을 하기 위한 전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사형 집행 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 는 “태형을 당하는 사람들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붉게 물든 허연 뼈가 노출되기도 했으며, 내장이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실제 현상을 목격한 이로써 증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인류는 악마적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양 영화 속에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로 줄곧 등장하는 ‘드라큘라’는 낮에는 수려한 외모로 사람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다가도 밤이 되면 뜨악스런 송곳이를 드러내고 인간의 동맥을 뜯어 수혈을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서양인들은 이러한 두려운 존재를 상상하면서 그런 존재를 이길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제물이 될 형편이었지만, 십자가를 지니고, 십자가를 그들 앞에 높이 추켜 세울 때 그들은 눈을 가립니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드라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며 들고 서 있는 이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런 악마적인 존재들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상상력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하도록 힘없는 피살인자의 피였지만 그가 흘리신 피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피보다도 값진 피였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적 존재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피에서 나온다 믿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지극히 정당한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 사상가들은 신성과 인성이 한데 연합하는 것에 반감을 갖은 나머지 신성과 인성의 양 극단 어느 것만을 선택하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있는 예수 안에 신성이 있음을 부인하거나, 혹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이 단지 육체를 걸치고 있던 존재였다고 주장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참 인간이 죽은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이 시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위한 쇼show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태형을 당하시거나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예수님은 신적 존재의 두루마기를 걸친 분이 아닙니다. 낭자狼藉한 그분의 피를 모종의 전위 퍼포먼스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발상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분의 자비심, 그분의 분노, 그분의 고통이 모두 인스턴트 액션이란 말입니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런 예수가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참 인간의 죽으심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눈물과 피로 기도하신 겟세마네의 기도 또한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를 하나님께 토로하는 어험한 순간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 에서 영주인 코도Cawdor가 들었던 “그의 삶에서 그가 삶을 떠나는 것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것도 없었다”는 말은 정확히 예수에게도 어울릴 정도로 모진 질고를 온통 겪으신 그분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터널을 붙잡아 껴안고 지나신 그분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 2000년전 오늘, 당신은 당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가요?
■■■■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
<2004.04.08>
하나님의 참 아들이요 인간의 참 아들
마니의 주장에 따라 주님께서 수난을 겪지 않았으니 그분에게 부활도 없었다고 하는가 하면,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 따라 말씀의 신성 자체가 수난받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거나 그리스도교 백성의 귀에 이것을 주입시키는 작태는 우리 종교의 기초를 뒤집어놓는 일이며, 하나님의 참 아들께서 동시에 사람의 참 아들이시라는 사실 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大 레오>
다시 한번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로마 병정들에게 얻어 맞으시면서 짐승처럼 끌려가서는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는 가운데 양손이 묶여진 채로 힘 없이 엎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은 태형을 시작합니다. 화면으로 보이는 병정이 들고 있는 채찍 끝에는 쇳조각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인들은 태형에 사용하는 채찍이 많게는 30-40 가닥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채찍 끝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쇳조각은 사람의 몸에 박혀 살점을 도려내고, 더 깊숙이 박힌 쇳조각은 잘 빠지지 않아 다시 힘을 주어 잡아 당겨서 빼내야 할 정도로, 사람에게 가하는 태형은 사형 집행을 하기 위한 전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사형 집행 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 는 “태형을 당하는 사람들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붉게 물든 허연 뼈가 노출되기도 했으며, 내장이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실제 현상을 목격한 이로써 증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인류는 악마적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양 영화 속에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로 줄곧 등장하는 ‘드라큘라’는 낮에는 수려한 외모로 사람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다가도 밤이 되면 뜨악스런 송곳이를 드러내고 인간의 동맥을 뜯어 수혈을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서양인들은 이러한 두려운 존재를 상상하면서 그런 존재를 이길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제물이 될 형편이었지만, 십자가를 지니고, 십자가를 그들 앞에 높이 추켜 세울 때 그들은 눈을 가립니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드라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며 들고 서 있는 이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런 악마적인 존재들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상상력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하도록 힘없는 피살인자의 피였지만 그가 흘리신 피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피보다도 값진 피였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적 존재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피에서 나온다 믿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지극히 정당한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 사상가들은 신성과 인성이 한데 연합하는 것에 반감을 갖은 나머지 신성과 인성의 양 극단 어느 것만을 선택하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있는 예수 안에 신성이 있음을 부인하거나, 혹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이 단지 육체를 걸치고 있던 존재였다고 주장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참 인간이 죽은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이 시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위한 쇼show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태형을 당하시거나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예수님은 신적 존재의 두루마기를 걸친 분이 아닙니다. 낭자狼藉한 그분의 피를 모종의 전위 퍼포먼스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발상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분의 자비심, 그분의 분노, 그분의 고통이 모두 인스턴트 액션이란 말입니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런 예수가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참 인간의 죽으심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눈물과 피로 기도하신 겟세마네의 기도 또한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를 하나님께 토로하는 어험한 순간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 에서 영주인 코도Cawdor가 들었던 “그의 삶에서 그가 삶을 떠나는 것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것도 없었다”는 말은 정확히 예수에게도 어울릴 정도로 모진 질고를 온통 겪으신 그분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터널을 붙잡아 껴안고 지나신 그분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 2000년전 오늘, 당신은 당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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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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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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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1
사랑의 절정, 십자가
이 십자가는 죽음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부채負債에 전혀 해당되지 않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大 레오>
멜 깁슨이 만든 "The Passion of The Christ" 가 국내에서도 개봉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만든 멜 깁슨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모습을 가능한 여과없이 생생하게 재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화면을 메우는 장면마다 예수님의 피로 붉게 물들고, 보는 이로 하여금 고통스런 예수님의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휘몰아 치던 절망의 고통을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마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처참한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극악한 공포심을 우리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됩니다.
신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한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늙어서 죽었다면 여러분의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 즉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한결같이 교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교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까?”
“그분이 속죄양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그 학생에게 재차 질문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에, 사람들을 만나 ‘네가 구원받았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 ”
다소 잠잠한 상태에서 웅성대는 틈을 타서 교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보여주신 모습만으로도 우리 주님으로서 충분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라도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초보적인 수업시간이었습니다만, 당시에 제가 받았던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보혈’에만 집중된 제 신앙에 뭔가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선포하신 수많은 구원 사건에는 그다지 큰 가치를 두지 못했던 모습이 오히려 회개해야 할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사람들을 만나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원의 모든 필요충분 조건을 보았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분의 ‘삶’만으로도 “예수님은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기에 충분해진 것입니다. 많은 이들과 만나 자신을 희생하고 참된 자비심을 보여주신 그분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사랑한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였으며,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을 표현해 주시되, 죽으시면서까지 사랑을 표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절망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에 그들의 모습에 애달픈 마음으로 사랑해주셨다면,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하신 기도는 얼마나 처연하고도 숭고한 사랑이었겠습니까.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영광이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라면,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은 또한 얼마나 영롱한 하나님의 영광이었겠습니까.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무한한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사랑한다 하셨지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닌 사랑이었으며, 끝임과 동시에 새로이 겉잡을 수 없이 일어났던 사랑의 불이었던 것입니다.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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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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