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거기

사실 우리가 죽은 ‘후’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공간상의 사후세계를 알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후세계를 알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부터 죽음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게 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죽기 ‘전’에 진정으로 살 것이냐이다. - 모리스 젱델 -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갔습니다. 이때껏 절이나 무당을 찾아 가서 불공을 드린 것이 유일한 종교적 문화 체험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나도 낯선 교회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교회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되면서, 즉 교회에 다니는 맛을 알게 되면서 방과 후에는 매일 교회에 나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 되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던 당시를 회상해보면, 너무 지나치리만큼 교회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곤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뜨거운 체험, 그 순간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입니다. 그 후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제일 행복했었기에 거리에 붙여있던 벽보를 보고 당시 인천에서 행해진 집회란 집회는 거의 죄다 참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성령체험을 하면서 곧바로 제 머리에 주입되었던 것이 [종말론]이었습니다.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고, 그것을 대비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대학 3학년이었던 1992년 10월26일,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다미선교회를 고교시절 미리 접했더라면 어쩌면 저도 거기에 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마만큼 학창시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전도에 열심을 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 3년 내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집회에 참석했던 것일 정도니까요. 당시 고교생이었던 저는 인천, 서울, 대전, 부산, 평택, 수원 등등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날이 곧 다가온다는 이 무시무시한 말을 무기로 삼아 귀찮게 굴지 말라며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던 부산의 어떤 뱃사람 앞에서도 그다지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가 생생합니다. 벌써 15년이 훨씬 지난 그 때이지만 그 때 제 가슴에 품었던 비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고교시절의 추억입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이 종말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여타의 다른 교리나 신학 장르 중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구원론 등등의 중요한 신학적 진술들과 더불어 읽혀질 때 비로서 종말론은 올바른 꼴로 신앙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교시절의 제 모습이 때론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론 부끄럽기도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당시 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행한 설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으면서도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만 골라서 편식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오시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종말이 지연되면서 의견이 분분하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내가 전에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각각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십시오”[살전4:11]라고 권면하면서,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바탕이요 으뜸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윗 글에서 모리스 젱델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오해할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생활이 훗날 우리가 기약하는 그 세상에서의 삶과 이질적이라면, 훗날의 기약은 도리어 현실 생활을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현실의 시/공과 공감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나누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 [이 자리에서] / [거기 있는 존재Da-Sein]로서 온당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꽃에서 우주를 보고, 모래알 속에서 영원을 보는 눈은 시인 블래이크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맛볼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심판과 구원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동일한 메시지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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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散漫과 침잠沈潛

마르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산만한 호기심도 끊임없이 지껄이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하이덱거는 산만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그와 참으로 함께 있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산만한 호기심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어느 한 곳에 차분하게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이리저리 부산하게 왔다갔다한다. 산만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항상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서는데 이 경우에도 찾은 새로운 것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오직 또 다른 종류의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새로운 것을 찾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진리 하나를 알아 내려고 애쓰는 경우에도 알아낸 진리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음미하고 침잠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관심을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옮기기 위해서 이다. 그는 어느 하나에도 제대로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 안셀름 그륀 -


끊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를 피치 못해 접하고 살아야 하는 요즈음, 10년전 번역 출간된 책
반 퍼슨[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Cultuur in Stroomversnelling
를 떠올려 봅니다. 반퍼슨에 의하면 인류는 신화적 단계, 존재적 단계, 그리고 기능적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각각의 단계는 장점과 단점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데, 오늘날의 사회 문화를 그는 ‘기능적 단계’로 명명하며, 이 문화의 부정적인 힘을 조작주의operationalism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상호관계를 마치 장기판의 말이나 카드 놀이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처리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조작주의는 인간을 거대한 기계속에 맞춰진 나사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반퍼슨의 지적은 근대 300년의 변화보다 근래 30년의 변화가 더 빠르며, 근래 30년의 변화보다 최근 3년의 변화가 더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
[인간]과 [시간성]
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요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을 놓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화두가 되어 틈새 시간을 이용하고, 새벽형 인간이 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은 그마만큼 인간 사회의 구성이 급속도로 치열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틈새 시간과 새벽형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기 보다는 그런 인간형이 되어서 성취하고자 하는 내용이란 것이 본래적 인간의 모습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알뜰살뜰한 시간 탐색과 더불어 더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접하며 살고 있는 시대와 문화의 본질을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의 본질을 면밀히 검토하고 이해하여, 그것에 흔들리거나 맹목적으로 추종, 혹은 거부하는 삶이 아니라 그것들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조금씩 변혁해 나가는 힘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덱거의 지적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산만散漫할 것인가 아니면 침잠沈潛해 볼 것인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화되고 있는 오늘 날 교회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다양하고 새로운 것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말하고 싶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산만하고, 저급하다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여기 저기 자칫 산만해 보이는 여행을 다니시며 공생애를 다 보내신 예수님도 침잠의 때를 놓치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과 침묵 사이의 조율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겠습니다.<200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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