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30
이성적 영혼


이성적인 영혼 은 “육이 영을 거슬러 욕정을 일으키고 영이 육을 거슬러 일어날 때”(갈5:17)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움을 받아서 대비합니다. 또 그런 영혼은 절제의 못들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유혹하는 해로운 원욕들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大 레오>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신비의 근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짧디 짧은 단견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 비추어 볼 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다는 것, 아니 우리가 모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도 같은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실 때에 우리 안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독일 관념론의 창시자라 불리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는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의 두 원천을 감성과 오성이라 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감성Sinnlichkeit 은 인식에 있어서 다양한 재료를 제공해 주고 오성Verstand 은 그 재료에 통일적인 형식을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는 저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서의 말에서 처럼, 인간의 인식은 이 두가지 원천이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본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혹은 무언가를 계획하고, 평가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식에서 감성과 오성이 주고 받는 현상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세상에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이념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념의 예로서 그가 제시한 것은 영혼, 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영혼의 불멸성, 우주의 무한성, 신의 존재와 섭리 등에 관해서는 감성과 오성으로부터 해답을 얻어 낼 수 없기에, 이러한 이념을 대상하는 하는 것을
이성Vernunft
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인간의 인식을 이처럼 세분화한 것은 독일 관념론Deutscher Idealisumus의 정초가 되었다는 단순한 의미를 떠나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적 능력이 우리로 하여 하나님 인식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고, 이로써 ‘생각하는 자아’는 ‘책임적 자아’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 즉 ‘요청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칸트의 언명은 당대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분명
이성적 존재
입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단순한 ‘오성적 존재’를 뛰어 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리원칙이나 논리성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궁극적인 선과 악에 대해 바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들은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눈 뜨고 보아, 그 은총을 ‘은총 그 자체"로 올바로 인식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이 신비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각해왔던 것은 그마만큼 우리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과신過信하거나, 혹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무감각해져버린 까닭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뜰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이성적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이성을 조화 속에 운용할 수 있는 것이 남겨진 과제입니다. 올바른 이성적 인간은 자기를 유혹하는 해로운 원욕들이 무엇인지 바로 인식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하는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가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를 지신 사건 안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따라 갈 수 있는 용기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적 존재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맛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창조를 갈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하는 사람은 성 어거스틴의 고백과도 같이
“당신은 곧 나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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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려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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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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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9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그러므로 어느 때가 경건하게 살아야하는 것처럼 어느 때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니, 각자 자기 방식과 정도에 따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해라는 이름은 하나지만 싸움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며, 드러난 원수보다는 숨은 음모자에게서 오는 더 큰 위험이 종종 도사리고 있습니다. <大 레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주시고, 그들이 가는 길이 굽이굽이 험난한 길일지라도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함께 해 주십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에 개개인의 소소한 역사속에 배어 있는 지난한 아픔과 상처들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상처요 아픔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과정을 걸어가는 믿음의 도정은 또한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그려주신 선명한 발자취를 좇아 걷는 과정에서 때로 기뻐하고 삶의 환희를 누리며 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려진 이정표로 인해 당황하기도 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대 레오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맞는 십자가를 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박해라는 이름은 하나이지만, 싸움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밥상위에 올라오는 그릇은 용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듯이 동일한 크기나 동일한 내용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고기를 담은 그릇이라 해도 소금 종지만 못할 때가 있듯이, 그 가운데 어느 것은 중요한 것이고 어느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탐색과 발견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이어서 우리에게 어울리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담을 수 있는 내용물은 무엇이고 잘 씻겨져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우리가 물감이어서 내게 적합한 색상을 선별하려면 나는 무슨 색이며 다른 색과 혼합될 때의 변형된 모습을 견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리스 젱델Maurice Zundel 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태양처럼 늘 ‘이미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신다.
부재중인 것은 우리이다. 그분의 빛을 가로막는 벽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 마음이 부숴진 조각마음이면 영롱한 하나님의 모습도 단지 섬벅거리는 램프처럼 보일 것이며 혹 우리 마음이 뿌옇게 내려앉은 티끌마음이면 의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부질없는 억지시늉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먼저 아는 것바울 사도가 말한 각각의 지체로서의 삶에 선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게의 가치나 그 경중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으니 내 그릇의 크기와 용도, 그리고 무엇보다 청결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동일한 오감이 주어졌다고 해도, 경험에 따라 체감할 수 있는 영역이 달라지며 동일한 신체 조건이 주어졌다고 해도, 운동량에 따라 초시계를 달리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들려주신 바통을 부여잡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힘껏 양 팔과 다리를 움직여 도약하는 우리의 영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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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은총의 선물을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 살아가십시오.
[고린도전서 7장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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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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