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8
세상속 이 길에서


사실 어떠한 현혹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어떠한 원욕에도 전혀 자극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온통 유혹들로 가득 차 있는 현세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복된 사도 요한이, “우리가 죄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같이 그런 생각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大 레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선하게 지음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지난한 과정에 있어 예기치 못한 죄악의 모습을 닮아가곤 합니다. 이는 바울 사도의 고백에서처럼, 우리 안에 원치 않는 마음이 스며들어 사로잡아 허수아비 팔에 앉아 있는 참새마냥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사밀한 구석까지도 내버려 두지 않으며, 비교 우위를 점령하기 위한 손짓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세속에서 떠나 고독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던 것은 속세를 떠난 한적한 곳에서 규율과 수행의 시간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품기를 꿈꾸어 왔던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은, 그곳에도 세속의 여울은 여전하였는데, 상처와 용서가, 다툼과 화해가, 그리고 선과 악이 악어새 마냥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장된 자유함이나 완전한 선을 위한 시/공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서제가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인간이건 ‘사회성’이라는 산마루에 서서 여우바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서있는 이 산마루는 도리어 그 자체로 우리를 위해
예비된 성화聖化의 자리 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머물렀으나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셨던 것처럼, 님만 홀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가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사람이 있고, 죄가 있는 곳임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멀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도리어 자기만의 의義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유혹을 두려워하거나 애써 외면하지 않습니다. 죄가 많겠지만, 그보다 주님의 은총은 더욱더 창연蒼然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내가 ‘나’로 사는 바로 이 터에서 하나님 은총으로 햇빛촌을 이루며 사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초밤길을 걷듯 마냥 어둡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속 이 길
은 이미 주님이 걸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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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9-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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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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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7
경축하기에 앞서


경축해야 할 축일이 크면 클수록 이를 경축하는 사람도 그만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축제의 날에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마음의 기쁨을 육체의 옷으로 표시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며 종교적인 태도로 여겨집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의를 더 기울여 교회 자체를 화려한 장식으로 꾸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진짜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지혜롭게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에게 구원을 주는 성례를
경축하기에 앞서 어떤 죄의 때가 자기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이중적인 마음의 주름이 자기를 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사람의 내면이 악습들로 오염되어 더렵혀져 있다면, 아무리 외적으로 잘 꾸며 말끔한 모습을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大 레오>


“현재 여성 단체의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전국에 걸쳐 ‘향락업소’는 30만 곳이 넘고, 여기서 일하는 여성은 120만명 가량으로 15-29세 여성 전체 인구의 2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2000년 10월 13일, 한겨레신문 칼럼, 김금수 ‘여자답게 살고 싶어라’에서]

저의 표현으로 ‘사회 비평계의 중견 테러리스트’인
홍세화
씨는 위의 기사를 읽고, 한국 사회를 모파상의 소설에 빗대어 ‘비곗덩어리’ 사회라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 전북 군산 대명동 ‘쉬파리골목’ 화재 현장에서 다섯 명의 매춘 여성이 감금 상태에서 도피하지 못하고 숨졌다는 보도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던 때에 씌여진 글이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하였습니다. 젊은 여성 다섯명 중 한명은 매춘을 하고 있는 사회. 대한민국의 밤 풍경은 향락없소의 불 빛과 교회의 십자가만이 지키고 있다고 했나요. 전혀 어울리지 않아야 할 이 두 불빛이 우리 사회에서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읽혀지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이루어왔던 유럽의 그것보다도 더 화려한 맘모스 교회들이 수도권에 집중해 있음에도, 이처럼 외마디 소리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한 줄의 복음도 아니었습니다. 간혹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몇 몇 훌륭한 성직자나 교회를 볼 때면 저자신이 부끄럽기도하면서 유난스런 자극을 받게되는 것은, 그 프로그램이 마치 “(못믿겠지만) 그래도 아직 이런 성직자가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모습은 없고 외양만 찬란-휘청이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빠스카와 성탄과 같은 기쁨의 날을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세상 속 저 아래 사람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나의 웃음과 화려함에 가려진 것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大 레오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읽혀집니다.

“얼굴에도 빛이 있어야지만 마음은 더구나도 빛이 나야한다”는
함석헌 선생 의 가르침처럼,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닦고創業 그것을 지키는데守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얼굴에 지는 주름이걸랑 인생의 경륜으로 기쁘게 받아두고,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마음에 진 주름을 펴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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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던 그들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그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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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5>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