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4
인간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이들이 지니는 진정한 의로움은 자기가 감히 완전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인생 여정에서 자기 결심을 포기하고, 전진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릴 지경에 떨어지는 위험스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大 레오>
근대성을 넘어선 오늘의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폭압적인 행태로 드러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2차 세계 대전의 경우입니다.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집단적 자아 중심성에로의 선로에 올라선 뒤로 거침없이 몰아세운 그들의 향연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생명과 존엄을 앗아갔습니다.
어제 오늘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두개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와 2002년 개봉작이었던 [피아니스트] 였습니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교차되었던 책은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겪은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인간이 의미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의미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하나됨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불도저처럼 자기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앞뒤 가리지 않고 뛰는 모습도 불완전하여 자칫 낙마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삶이겠지만, 허송세월을 보낸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쉽게 좌절하는 모습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죽음과 절망의 상황.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도라의 남편이자 조수아의 아버지 귀도는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으로 당당한 유머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Spiel Mann, 연주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처럼 공포의 순간에서도 손가락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빅터 프랭클은 제 아무리 암암적벽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예술이 있고, 유머가 있고, 정치가 있고, 종교가 있을 수 있음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소중한 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생의 의미에 게으르고 무감했던 우리의 삶으로 인하여 회개하십시오. 大레오의 말처럼 그것은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것 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 가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데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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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2>
인간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이들이 지니는 진정한 의로움은 자기가 감히 완전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인생 여정에서 자기 결심을 포기하고, 전진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릴 지경에 떨어지는 위험스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大 레오>
근대성을 넘어선 오늘의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폭압적인 행태로 드러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2차 세계 대전의 경우입니다.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집단적 자아 중심성에로의 선로에 올라선 뒤로 거침없이 몰아세운 그들의 향연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생명과 존엄을 앗아갔습니다.
어제 오늘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두개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와 2002년 개봉작이었던 [피아니스트] 였습니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교차되었던 책은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겪은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인간이 의미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의미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하나됨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불도저처럼 자기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앞뒤 가리지 않고 뛰는 모습도 불완전하여 자칫 낙마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삶이겠지만, 허송세월을 보낸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쉽게 좌절하는 모습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죽음과 절망의 상황.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도라의 남편이자 조수아의 아버지 귀도는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으로 당당한 유머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Spiel Mann, 연주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처럼 공포의 순간에서도 손가락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빅터 프랭클은 제 아무리 암암적벽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예술이 있고, 유머가 있고, 정치가 있고, 종교가 있을 수 있음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소중한 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생의 의미에 게으르고 무감했던 우리의 삶으로 인하여 회개하십시오. 大레오의 말처럼 그것은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것 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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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 가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데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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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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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
"금식에 관하여"
성스런 역사가 말해주듯이, 옛적에 히브리 백성과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들 때문에 블레셋인들의 가혹한 지배를 받고 있었을 때, 영혼과 육신의 힘을 회복하게 하는 단식을 함으로써 적군들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가혹하고 비참한 종살이가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먼저 악습들을 쳐 이기지 않고서는 무기를 들고 싸운들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과 음료를 절제하면서 자신들에게 참회의 엄한 벌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적들을 쳐 이기기 위해 먼저 목의 유혹을 그들 안에서 쳐 이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포악한 적군이며 가혹한 지배자들은 배부른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지배하고 있는 굶주린 히브리인들 앞에서 도망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大 레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말할 때가 있으면 침묵할 때가 있고, 함께 어울릴 때가 있으면 홀로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베른트 하인리히가 대부분의 곤충과 동물들은 동면冬眠이나 하면夏眠과 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먹이 부족에 적응하기 위한 비활동 기간을 겪는다고 말한 것처럼 먹을 때가 있으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사순절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먹지 않는 행위' 자체 보다 '먹지 못하는 마음'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금식 하는 것이 고행하는 것과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과 희락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히 금식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상가喪家의 상주의 마음처럼 먹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때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겸손을 생각하는 사순절에 하는 금식은 ‘먹지 않는 행위’에는 큰 의미가 없다하더라도 그 행위자의 마음 상태를 맑게 해주며, 이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금식하는 것이 자랑이나 그 어떠한 것 때문이 아니라 트미한 속사람에서 호연한 속사람으로의 과정을 보는 시간임과 동시에 먹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도록 허락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의 영광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세속에 머물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속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세속에 초연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도약을 위한 시간입니다.
■■■■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4절)
<200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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