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6
우리 경험


그러므로 자비심에서 나온 행적은 우리의 기쁨이 되며, 영생을 위해 먹는 그 양식들로 우리는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경비로 식사하고 배부르게 되는 것에 기뻐합시다. 우리가 헐벗은 이들에게 필요한 의복을 주어 그들이 입게 될 그 옷들에 대해서도 기뻐합시다. 마음이 관대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적게 바치지 않을 것이며, 자비나 동정심의 정도는 재물의 분량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론 부유한 이들이 더 많이 바치고 넉넉지 못한 이들은 적게 바치겠지만, 선행을 하는 이들의 사랑이 동일하다면 그 행위의 결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大 레오>


제레미 리프킨 의 지적처럼 인간이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안정’security을 추구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은 침범 받지 않는 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금을 긋고 담을 세워 안과 밖의 경계를 분명히 해 나감으로써 만족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사유 재산을 추동력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지금껏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담벼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히려 인류는 원치 않는 불안으로 떨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마음 놓고 뛰어 놀 공간 대신에 위험천만한 도로와 주차장이 생겨나고, 가족이 붕괴되고 사람 사이의 신뢰와 유대감이 사라지며, 사회 환경은 물론이고, 전지구적 환경이 파쇄되어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무쇠낯짝으로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를 몰아세운 이들은 득의양양하고 있지만 ‘나’를 버려 ‘우리’를 살리려했던 익명의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은 빈곤의 경계 초병으로 묶여있는 대한민국의 극단적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 언명은 대책 없는 책상물림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지금의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를 잊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공동체로서 존재하며, 이로써 ‘나’의 의미는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는 또한 경계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한 공동체로 품에 안을 수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는 무척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자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 아닌 계급간의 만남class encounter,
즉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구제해 주는 그런 만남의 사회를 원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회복되어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의 말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현재 지니고 있는 조건과 상황은 서로를 공격하고 끌어 내릴 무기가 아니라 서로간의 치유를 위한 요긴한 도구입니다.


무산계급이었던 예수께서 저 혼자 ‘올라 서’ 있는 삭개오를 ‘내려오라!’ 불러주시고, 그와 함께 평등한 공동 식탁에 앉아 다순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경청해주셨던 것은 계급간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간의 치유에 있어 주님은 우리를 프론티어로 세우십니다. 마음에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내고 제2의 삭개오를 부르러 가라 하십니다. 소유를 위해 달려왔던 억센 과거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살피고서
‘우리 경험’ 의 기쁨을 맛보라 부르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하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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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성경 말씀에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일이지만,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야고보서 2장1절,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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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4>
And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5
푸근한 마음 영민한 눈빛


친애하는 여러분, 호시탐탐 끊임없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원수를 무찌르는 데 열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것이 유익하지만, 매우 교활한 원수들이 아주 교묘한 미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지금에는 특히 더 정신을 차려 대비하고 있어야 하며,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합니다. <大 레오>


인도의 잠언에 보면 “악은 곧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지와 같이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악을 행한 그 자신을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수면위로 정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무탈한 것으로, 그리고 도리어 선함과 유익함의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특별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고 있는 오늘날,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열려진 여트마한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악한 기운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곤 합니다. 추운 겨울 날, 잠에 취한 사람은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이불 탓으로 돌려 뒤집어 쓰고 사지를 좁혀 계속 잠을 청하겠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이내 황소바람을 감지하고서 빈틈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틈이 좁은가 넓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의적 가장善意的 假裝 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인류의 수많은 크고 작은 약탈사에 있어서 단 한번이라도 선의적 가장을 쓰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합시다.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탈을 쓰고 행한 말로다 할 수 없는 악행들... 백인이 아닌 인종들, 여성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유태인들,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인들에 대한 침략과 학살에까지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내 욕심에 투영해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은 황소바람입니다. 大레오가 말한 ‘호시탐탐 노리는 원수’는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욕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보고서 살기등등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바리새인들처럼 ‘명분이 있고 가면을 썼으니 안심하라. 누가 뭐라 하랴!’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사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깊숙이 안착되어 있는 이러한 파편들이 얼마나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 돌이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곰삭은 마음이걸랑 갈아엎고umpflügen, 흐릿한 티끌눈을 하고 있걸랑 눈물로 흘려
푸근한 가슴 과 더불어 영민한 눈빛
으로 사순절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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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디모데전서 6장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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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3>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