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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기쁨의 공간
내 안에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들어 있다. 나 자신의 깊숙한 곳에는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종류의 이해와 인정보다 훨씬 강한 생명력과 삶에 대한 애착이 들어 있다. 기쁨은 표출되고 싶어하는 에너지이고, 밖으로부터 오는 방해 요소보다 강한 에너지이다. 폭포수가 아래로 흘러가면서 주변의 자갈을 비롯한 모든 잡동사니들을 씻어 내리고 바위를 닳게 하여 변형시키듯이, 기쁨은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모두 쓸어 내려서 삶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생동적인 에너지이다. 기쁨은 자신을 가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쁨은 모든 종류의 방해요소를 극복하고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고 만다. - 안셀름 그륀 -
한동안 마치 봄을 건너뛴 천덕꾸러기같은 여름 날씨였지만, 이제 비로소 본 궤도를 찾은 듯 햇살 아래 선 저의 모습이 봄기운으로 밝아집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뜨거운 햇살이나 혹은 매서운 칼바람은 난로 앞에 앉아 수박을 우걱거리거나 선풍기 바람을 쬐며 귤 껍질을 열여 제끼는 것처럼, 입에서는 단맛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웬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 몸 전체가 아닌 혀끝에서만 맴도는 과일 맛은 불구의 미각에 머무는 것처럼 완연한 사계절은 단지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서 나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 존재자들의 변화, 특별히 인간성의 회복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 현상이 순서가 뒤바뀌거나 엉킨채로 돌아가는 모습은 요사이 모든 장르에서 한창 유행인 퓨전fusion적 현상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이 급속도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음의 빈곤과 공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이 공허하면 우리의 행동도 공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공허해지면 그와 관계하는 이들도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인 사회, 그 사회들이 모인 국가와 세계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채로 공허한 것을 탐닉하고 만족하는 현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기쁨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마음이 기쁘다는 것은 자극적인 외부적 현상에 의해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셀름 그륀이 우리 안에 아무도 해치거나 침범할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있다 말했듯이, 그 공간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 기쁨은 무엇이며, 그 기쁨이 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삶이 가능할까요? 안셀름 그륀은 그것을 ‘폭포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파에 맞서 이겨낼 수 있는 참 기쁨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흐르는 물줄기처럼, 번잡스레 자리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거짓 기쁨을 몰아내고 거듭 위선적 기쁨을 심고자 막아서는 돌맹이들을 자연스런 에너지로 쓸어내려 저 폭포 아래에 내리쌓이게 하는 현상과도 같습니다.
누구나 하염없이 흘러내릴 기쁨의 폭포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이 아니면 참된 기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외적 현상이 만들어 주는 기쁨은 도리어 참 기쁨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겨울에 먹을 수 있는 수박은 혜택이요 진보라기 보다는 리듬을 깨는 어긋난 박자이며, 본 박자로 되돌아가야 하는 징조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표출할 수 있는 맛은 세치혀에 국한된 기쁨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어 온 몸에 주어지는 참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요 그 기쁨을 표출하고 전이시킬 대상일 것입니다. <2004.05.06>
내 안에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들어 있다. 나 자신의 깊숙한 곳에는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종류의 이해와 인정보다 훨씬 강한 생명력과 삶에 대한 애착이 들어 있다. 기쁨은 표출되고 싶어하는 에너지이고, 밖으로부터 오는 방해 요소보다 강한 에너지이다. 폭포수가 아래로 흘러가면서 주변의 자갈을 비롯한 모든 잡동사니들을 씻어 내리고 바위를 닳게 하여 변형시키듯이, 기쁨은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모두 쓸어 내려서 삶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생동적인 에너지이다. 기쁨은 자신을 가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쁨은 모든 종류의 방해요소를 극복하고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고 만다. - 안셀름 그륀 -
한동안 마치 봄을 건너뛴 천덕꾸러기같은 여름 날씨였지만, 이제 비로소 본 궤도를 찾은 듯 햇살 아래 선 저의 모습이 봄기운으로 밝아집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뜨거운 햇살이나 혹은 매서운 칼바람은 난로 앞에 앉아 수박을 우걱거리거나 선풍기 바람을 쬐며 귤 껍질을 열여 제끼는 것처럼, 입에서는 단맛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웬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 몸 전체가 아닌 혀끝에서만 맴도는 과일 맛은 불구의 미각에 머무는 것처럼 완연한 사계절은 단지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서 나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 존재자들의 변화, 특별히 인간성의 회복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 현상이 순서가 뒤바뀌거나 엉킨채로 돌아가는 모습은 요사이 모든 장르에서 한창 유행인 퓨전fusion적 현상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세상이 급속도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음의 빈곤과 공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이 공허하면 우리의 행동도 공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공허해지면 그와 관계하는 이들도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인 사회, 그 사회들이 모인 국가와 세계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채로 공허한 것을 탐닉하고 만족하는 현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기쁨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마음이 기쁘다는 것은 자극적인 외부적 현상에 의해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셀름 그륀이 우리 안에 아무도 해치거나 침범할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있다 말했듯이, 그 공간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인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 기쁨은 무엇이며, 그 기쁨이 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삶이 가능할까요? 안셀름 그륀은 그것을 ‘폭포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파에 맞서 이겨낼 수 있는 참 기쁨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흐르는 물줄기처럼, 번잡스레 자리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거짓 기쁨을 몰아내고 거듭 위선적 기쁨을 심고자 막아서는 돌맹이들을 자연스런 에너지로 쓸어내려 저 폭포 아래에 내리쌓이게 하는 현상과도 같습니다.
누구나 하염없이 흘러내릴 기쁨의 폭포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이 아니면 참된 기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외적 현상이 만들어 주는 기쁨은 도리어 참 기쁨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겨울에 먹을 수 있는 수박은 혜택이요 진보라기 보다는 리듬을 깨는 어긋난 박자이며, 본 박자로 되돌아가야 하는 징조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표출할 수 있는 맛은 세치혀에 국한된 기쁨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어 온 몸에 주어지는 참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요 그 기쁨을 표출하고 전이시킬 대상일 것입니다. <200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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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존재하라
우리의 존엄성은 우리의 뱃속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고 있는 구조물을 비판하고 부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우주에서 벗어나 높이 떠올라 저 창조적 존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을 방해하는 거짓 자아를 우리 자신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게 되면, 하나님도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에 우리의 자유가 숨쉬는 저 무한의 공간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 모리스 젱델 -
인간이 존엄한 가장 명백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긴하나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그분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니고서는 달리 어떻게 자신의 모습대로 지을 수 없어서 지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한사람 한사람 참 곱고도 귀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빚으시는 순간, 감격의 마음과 떨리는 손을 애써 가라앉히시며 정글디정근 사랑의 마음을 다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로써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어디 인간의 모습이 존엄하다고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울까요? 속임과 술수, 거짓과 교만, 그리고 살인을 넘어 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 끝을 다한 것인양, 드러낼 수 있는 극악한 행태를 모두다 꺼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신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시각각으로 급격해지고 있는 존엄성에의 도전은 종말을 예감토록 하곤 합니다.
어느 캄캄한 밤, 무섭도록 질주해 오는 죄책의 무게로 절망했던 적이 있습니까? 인생의 그릇된 판단과 실수로 인해서 자신을 학대하고 싶을 정도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범하는 악한 행동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의 판단, 나의 결정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래서 ‘나’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판단하고 결정했던 ‘나’라는 것은 온전한 ‘나’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 그 ‘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나’였을 것입니다. 아직 ‘나’조차도 잘 모르는 ‘나’가 행한 일들로 인해서 그저 상처받고 손놓고 비관하는 모습은 ‘거짓 나’에게 두 번 속아넘어가는 일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정당한 듯 보이도록 수런대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요, 훼손된 우리 자신을 방치하도록 꼬득이는 악한 존재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존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인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을 이동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간상의 포인트가 죄요 타락이요 절망이라면, 우리에게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리스 젱델의 말처럼 우리가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바울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을 모시는 성소聖所]가 되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초월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2004.05.03>
우리의 존엄성은 우리의 뱃속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고 있는 구조물을 비판하고 부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우주에서 벗어나 높이 떠올라 저 창조적 존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을 방해하는 거짓 자아를 우리 자신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게 되면, 하나님도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에 우리의 자유가 숨쉬는 저 무한의 공간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 모리스 젱델 -
인간이 존엄한 가장 명백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긴하나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그분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니고서는 달리 어떻게 자신의 모습대로 지을 수 없어서 지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한사람 한사람 참 곱고도 귀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빚으시는 순간, 감격의 마음과 떨리는 손을 애써 가라앉히시며 정글디정근 사랑의 마음을 다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로써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어디 인간의 모습이 존엄하다고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울까요? 속임과 술수, 거짓과 교만, 그리고 살인을 넘어 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 끝을 다한 것인양, 드러낼 수 있는 극악한 행태를 모두다 꺼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신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시시각각으로 급격해지고 있는 존엄성에의 도전은 종말을 예감토록 하곤 합니다.
어느 캄캄한 밤, 무섭도록 질주해 오는 죄책의 무게로 절망했던 적이 있습니까? 인생의 그릇된 판단과 실수로 인해서 자신을 학대하고 싶을 정도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범하는 악한 행동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의 판단, 나의 결정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래서 ‘나’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판단하고 결정했던 ‘나’라는 것은 온전한 ‘나’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 그 ‘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나’였을 것입니다. 아직 ‘나’조차도 잘 모르는 ‘나’가 행한 일들로 인해서 그저 상처받고 손놓고 비관하는 모습은 ‘거짓 나’에게 두 번 속아넘어가는 일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안에서 정당한 듯 보이도록 수런대는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요, 훼손된 우리 자신을 방치하도록 꼬득이는 악한 존재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존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인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강조점을 이동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간상의 포인트가 죄요 타락이요 절망이라면, 우리에게 가능성은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리스 젱델의 말처럼 우리가 [저 무한한 존재가 머무시는 성지聖地]가 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바울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을 모시는 성소聖所]가 되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초월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200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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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나는 하나님의 창조계에 진화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몸을 빚으려고 바위에서 재료를 취하셨고, 신경조직을 뽑아내시려 꽃잎의 맥들을 본따셨다는 생각만 해도 흥겹다. 그러나 내게 넣어주실 본심을 생각하셨을 때 그 분든 당신 자신에게서 모델을 찾으셔야 했다. 성삼위 생명에서 본을 뜨셨다. 그래서 당신의 모습 따라, 당신과 비슷하게 나를 만드셨다. 마음이 통하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자식을 만드시는 솜씨였다. 자식은 아버지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이다. 아버지의 자유를 이어받은 자유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통하는 마음이다. 그분의 계획은 끝이 나지 않았고, 그 분의 일손은 완성되지 않았다. 끝났다면 세상은 종국이 올 것이다.
끝나기까지 얼마나 간격이 남았는지는 우리 각자에게서 어림잡히는 간격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참된 탄생, 보이는 사물들의 좁다란 동굴을 빠져나가 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날이 언제쯤일까? 그날 우리는 아들의 자격으로 그분의 집에 발을 들여 놓을 것이다. 벽을 장식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집에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한 그루 화분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아버지를 몰라보는 집짐승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 까를로 까레또 -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진화론자 찰스 다윈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은 운집된 자연의 작동은 [우연적]이며, 그 행태는 [투쟁적]이라는 것을 밝혀낸 점일 것입니다. 당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정반대하는 모습처럼 보였고, 마치 수백년전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의 학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교회는 긴장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는지, 억지춘향으로라도 그를 묶어 두려는 의미없는 조바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스스로 놀라 고민하였지만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 출간된지 1년 후인 1860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놀라운 우주, 특히 인간의 본성을 보고 모든 것이 무자비한 힘의 결과라고 결론짓는 것에 아무래도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나 작동되는 세세하게 갖추어진 설계된 법칙들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 것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 책을 출간한 뒤로도 교구 목사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난 그 어떤 것’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과학에 대해 보여왔던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과학적 발견에 의해 삶이 변하고 세계관이 변화하고 있으나 그들의 세계관은 6.000년 지구 역사를 고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성과에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과학적 성과에 반응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가설적이며 한시적인 성과에 조급한 신학적 결론을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IT업계 근황의 단적인 예에서와 같이 현대의 우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빅뱅이론조차도 맹백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며 잠정적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듯이 과학적 발견은 그것에 동참하고, 면밀히 탐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성과 보고서를 접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세계관을 한시성에 묶어놓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신앙인들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햐여 존 호트John F. Haught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빅뱅 이론이 신학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 중 하나는 최소한 그것이 우리의 종교 사상에서 다시 한 번 우주를 고려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집을 지어 주신 하나님의 창조 행동을 찬미하는 것은 세상의 급류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기계적 역학관계가 아니라 옥루玉淚를 주고 받는 자비의 역학입니다. 그 역학은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으로 손수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기에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창조주를 힘껏 부를 수 있도록 이 마음의 창을 닦고 자비의 역학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창조의 때에 우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태초의 바람이 불어 우리 가슴을 시원케하고, 그 바람 맞아 파릇해진 마음으로 저 언덕 위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살찬 바람 맞으며 살아나가는 소조한 인생들일수록 이런 간절한 마음이 더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손수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상상만으로도 이처럼 가슴뛰고 행복할진데,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때는 말로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 자비의 역학을 품은 이들의 찬미는 자식의 노래이며, 그것을 흔들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2004.05.01>
나는 하나님의 창조계에 진화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몸을 빚으려고 바위에서 재료를 취하셨고, 신경조직을 뽑아내시려 꽃잎의 맥들을 본따셨다는 생각만 해도 흥겹다. 그러나 내게 넣어주실 본심을 생각하셨을 때 그 분든 당신 자신에게서 모델을 찾으셔야 했다. 성삼위 생명에서 본을 뜨셨다. 그래서 당신의 모습 따라, 당신과 비슷하게 나를 만드셨다. 마음이 통하고, 자유가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자식을 만드시는 솜씨였다. 자식은 아버지의 생명에서 나온 생명이다. 아버지의 자유를 이어받은 자유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통하는 마음이다. 그분의 계획은 끝이 나지 않았고, 그 분의 일손은 완성되지 않았다. 끝났다면 세상은 종국이 올 것이다.
끝나기까지 얼마나 간격이 남았는지는 우리 각자에게서 어림잡히는 간격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참된 탄생, 보이는 사물들의 좁다란 동굴을 빠져나가 창조주를 우러러 온전한 정신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날이 언제쯤일까? 그날 우리는 아들의 자격으로 그분의 집에 발을 들여 놓을 것이다. 벽을 장식하는 한 폭의 그림으로 집에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한 그루 화분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아버지를 몰라보는 집짐승으로 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으로다. - 까를로 까레또 -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진화론자 찰스 다윈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은 운집된 자연의 작동은 [우연적]이며, 그 행태는 [투쟁적]이라는 것을 밝혀낸 점일 것입니다. 당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정반대하는 모습처럼 보였고, 마치 수백년전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의 학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교회는 긴장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는지, 억지춘향으로라도 그를 묶어 두려는 의미없는 조바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스스로 놀라 고민하였지만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 출간된지 1년 후인 1860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놀라운 우주, 특히 인간의 본성을 보고 모든 것이 무자비한 힘의 결과라고 결론짓는 것에 아무래도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나 작동되는 세세하게 갖추어진 설계된 법칙들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 것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찰스 다윈은 그가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 책을 출간한 뒤로도 교구 목사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연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벗어난 그 어떤 것’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나 봅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과학에 대해 보여왔던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과학적 성과를 전혀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과학적 발견에 의해 삶이 변하고 세계관이 변화하고 있으나 그들의 세계관은 6.000년 지구 역사를 고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성과에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과학적 성과에 반응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가설적이며 한시적인 성과에 조급한 신학적 결론을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IT업계 근황의 단적인 예에서와 같이 현대의 우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빅뱅이론조차도 맹백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며 잠정적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듯이 과학적 발견은 그것에 동참하고, 면밀히 탐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성과 보고서를 접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세계관을 한시성에 묶어놓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신앙인들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햐여 존 호트John F. Haught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빅뱅 이론이 신학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 중 하나는 최소한 그것이 우리의 종교 사상에서 다시 한 번 우주를 고려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집을 지어 주신 하나님의 창조 행동을 찬미하는 것은 세상의 급류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기계적 역학관계가 아니라 옥루玉淚를 주고 받는 자비의 역학입니다. 그 역학은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으로 손수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이기에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창조주를 힘껏 부를 수 있도록 이 마음의 창을 닦고 자비의 역학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 창조의 때에 우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태초의 바람이 불어 우리 가슴을 시원케하고, 그 바람 맞아 파릇해진 마음으로 저 언덕 위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살찬 바람 맞으며 살아나가는 소조한 인생들일수록 이런 간절한 마음이 더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손수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상상만으로도 이처럼 가슴뛰고 행복할진데,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때는 말로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 자비의 역학을 품은 이들의 찬미는 자식의 노래이며, 그것을 흔들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200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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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일부터
빠르고 복잡해지는 생활 속에서 성공하는 시간관리의 핵심은 바쁜 일들을 우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덜 급하나 소중한 일부터 먼저 하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바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빠른 길은 방향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삶은 시간이기에 한정된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부터 먼저 하는 거겠지요. 여유가 생기면, 준비만 갖추면, 언젠가는, 하면서 자꾸 미루다간 영영 못하고 맙니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해가서 차츰 몸도 의지도 다 빛바래가고 맙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게 시간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쫓기고 망쳐지면서 돈과 여유를 아무리 추구해봐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고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내 한 생의 겉돌기를 멈추고 곧장 삶의 핵심으로 들어갈 순 없을까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그 일을 지금 이대로 바로 시작할 순 없을까요.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린 돈도 학벌도 신분도 조건도 다 제치고 오직 사람 하나 보고 맑은 눈빛 하나 보고 곧장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지요 참 맑고 뜨거웠지요. 우린 세상의 가장 낮고 그늘진 현장에서 기다림 하나 키우며 살기로 했지요. 그 약속 그 사랑으로 우리 여기까지 함께 와 있지요. - 박노해 -
오래 전 가르쳤던 제자가 결혼, 직업, 그리고 신앙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고, 그것은 결혼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말들이 생각이 났지만, 웬지 섣부른 말보다는 그의 말을 더 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얘기하는 것이 결혼할 상대의 조건을 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지금 그가 하는 일을 뒷받침 해줄만한 재력이 있는지,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등등을 총괄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사랑이란 건 별로 의미가 없어지고, 흔히들 말하듯이 정 때문에 살게되기 마련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귀에 박히도록 얘기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제가 과연 그런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을 스스로 안고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원론적인 얘기인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의 목적은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보아 성화聖化 혹은 신화神化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시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과정으로, 혹은 그런 도구로서 직업을 선택하고, 만날만한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도 그럴 때에 더 빛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목적을 두고 그것에 만족할만한 결혼 상대를 찾고, 일을 찾는다면 그 일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성공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결혼이나 직업은 단순히 자신의 욕구나 만족감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용돈’money for current use을 버는 것일 수 없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야구 선수는 야구를 하면서, 환경 미화원은 환경 미화를 하면서, 전업주부는 살림살이를 통해서, 그리고 본인은 학문을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말한 바 있듯이 저마다가 선택하고, 또 주어지는 직업이란 것을 ‘돈벌이’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로렌스 수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수도회에서 가장 영성이 깊은 사람은 자신도 아니요, 더 유명한 수도사도 아니며, 다름아닌 주방장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주방장은 자신이 하는 손놀림 속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릇을 닦는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오히려 오랜 기간의 기도보다 더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매순간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며, 성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직업이고, 그것이 결혼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박노해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 드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중한 일을 깨닫고 행할 수 있는 정도定道이며, 그 길을 걷는 이들은 그들에게 복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감격하는 나날이 될 것입니다. <2004.05.05>
빠르고 복잡해지는 생활 속에서 성공하는 시간관리의 핵심은 바쁜 일들을 우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덜 급하나 소중한 일부터 먼저 하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바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빠른 길은 방향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삶은 시간이기에 한정된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부터 먼저 하는 거겠지요. 여유가 생기면, 준비만 갖추면, 언젠가는, 하면서 자꾸 미루다간 영영 못하고 맙니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해가서 차츰 몸도 의지도 다 빛바래가고 맙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게 시간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쫓기고 망쳐지면서 돈과 여유를 아무리 추구해봐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고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내 한 생의 겉돌기를 멈추고 곧장 삶의 핵심으로 들어갈 순 없을까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그 일을 지금 이대로 바로 시작할 순 없을까요.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린 돈도 학벌도 신분도 조건도 다 제치고 오직 사람 하나 보고 맑은 눈빛 하나 보고 곧장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지요 참 맑고 뜨거웠지요. 우린 세상의 가장 낮고 그늘진 현장에서 기다림 하나 키우며 살기로 했지요. 그 약속 그 사랑으로 우리 여기까지 함께 와 있지요. - 박노해 -
오래 전 가르쳤던 제자가 결혼, 직업, 그리고 신앙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고, 그것은 결혼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는 말들이 생각이 났지만, 웬지 섣부른 말보다는 그의 말을 더 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얘기하는 것이 결혼할 상대의 조건을 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지금 그가 하는 일을 뒷받침 해줄만한 재력이 있는지,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등등을 총괄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사랑이란 건 별로 의미가 없어지고, 흔히들 말하듯이 정 때문에 살게되기 마련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귀에 박히도록 얘기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제가 과연 그런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을 스스로 안고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원론적인 얘기인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의 목적은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보아 성화聖化 혹은 신화神化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시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과정으로, 혹은 그런 도구로서 직업을 선택하고, 만날만한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도 그럴 때에 더 빛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목적을 두고 그것에 만족할만한 결혼 상대를 찾고, 일을 찾는다면 그 일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성공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결혼이나 직업은 단순히 자신의 욕구나 만족감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용돈’money for current use을 버는 것일 수 없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야구 선수는 야구를 하면서, 환경 미화원은 환경 미화를 하면서, 전업주부는 살림살이를 통해서, 그리고 본인은 학문을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간다고 말한 바 있듯이 저마다가 선택하고, 또 주어지는 직업이란 것을 ‘돈벌이’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로렌스 수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수도회에서 가장 영성이 깊은 사람은 자신도 아니요, 더 유명한 수도사도 아니며, 다름아닌 주방장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주방장은 자신이 하는 손놀림 속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릇을 닦는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오히려 오랜 기간의 기도보다 더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매순간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며, 성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직업이고, 그것이 결혼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박노해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서로의 존재 깊은 곳으로 파고 드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중한 일을 깨닫고 행할 수 있는 정도定道이며, 그 길을 걷는 이들은 그들에게 복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감격하는 나날이 될 것입니다. <200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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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의 기반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미움을 볼 때조차도 감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위에서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 헨리 나웬 -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달을 보며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나 언제나 저 위에 떠 있는 분처럼 느끼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 멀리 떠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계신 걸까요. 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우리 세상 속에 갖혀 있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에 계시기만 한 것일까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필시 벌써 그 길에서 내려와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함께 길을 걷는 수없이 많은 도반들로 인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거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존재로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의 시험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생몸살과도 같은 일들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성도들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성인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참 모습은 그런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여서 거룩의 위장술을 부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의식 차원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해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존재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성도聖徒가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아닌 존재들]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타인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데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하듯이, 아직-아닌 것을 지금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존재하는 ‘우리’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 안에 생명의 지탱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타인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의 시험장에서 다져진 마음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달빛만을 내려 보내는 하늘의 저 달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머무시지 않고 우리 위에서 은총을 단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가 머리 위로, 그리고 우리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은 손이라는 국부적 영역에 비할데 없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로써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인 것입니다. <2004.04.26>
기독교 공동체가 온전한 의미를 지니려면, 서로에게 우리가 이미 본 것을 기다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란 우리 가운데서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장소이다. 그 불꽃이 자라며 우리 안에서 강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안에 절망의 유혹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영적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미움을 볼 때조차도 감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위에서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볼 때조차도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 - 헨리 나웬 -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회의가 오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달을 보며 “나의 세상에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세상에 내가 살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나 언제나 저 위에 떠 있는 분처럼 느끼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 멀리 떠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계신 걸까요. 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우리 세상 속에 갖혀 있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한 곳에 계시기만 한 것일까요.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면 필시 벌써 그 길에서 내려와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함께 길을 걷는 수없이 많은 도반들로 인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외로운 길이거나 불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서로서로를 지탱시켜 주는 존재로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의 시험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생몸살과도 같은 일들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성도들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성인들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로서 교회의 참 모습은 그런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여서 거룩의 위장술을 부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의식 차원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해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존재들이 아닙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성도聖徒가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아닌 존재들]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타인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데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하듯이, 아직-아닌 것을 지금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존재하는 ‘우리’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 안에 생명의 지탱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타인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의 시험장에서 다져진 마음씨를 가지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잡히지 않고 달빛만을 내려 보내는 하늘의 저 달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머무시지 않고 우리 위에서 은총을 단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비가 머리 위로, 그리고 우리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느낌은 손이라는 국부적 영역에 비할데 없을 것입니다. 그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로써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인 것입니다. <200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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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음에의 막연한 두려움
비어 있음은 잉태의 공간이고, 모든 창조는 이 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이 비어 있음의 공간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맞는다. 마치 심연이나 영원으로의 차가운 추락.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위험한 부정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둘러싸인 영역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웨인 멀러 -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마당에 나와 문득 뒷산을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하늘 곳곳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과 둥근 달,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진 조령산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산의 밤공기와 풍경은 시각을 맑게 정제해주고 교정해주며 그 곳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정도로 매력적인 비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산에 혼자 올라 보려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홀로 성큼 들어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인데 오르려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라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산에 올라 자칫 산짐승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 발을 헛디뎌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에 오르는 두려움이 분명 이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경험이 없다는 구차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용기를 내볼 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웠을때 느끼는 해방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자 하는 그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비움으로 가능한 것들을 헤아려 볼 수는 있어도 정작 비우지는 못합니다. 이는 늘 채우려고만 발버둥치는 우리 삶의 구조로 인함이며, 채움으로만 만족해 왔던 과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됨 속에 살며 그릇됨을 방편으로 삼아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한시적 기쁨과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한정적 만족감, 이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른 가능성에로의 열린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수학을 모두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수세계의 다양함을 보고 싶은 이들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신비속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막연한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막연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으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고자 내딛는 첫 발은 불편한 우리의 믿음이 공고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막연하다’는 것은 도리어 ‘가능성’이며,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4.04.21>
비어 있음은 잉태의 공간이고, 모든 창조는 이 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어 있음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이 비어 있음의 공간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맞는다. 마치 심연이나 영원으로의 차가운 추락.
살아 있고, 볼 수 있으며,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위험한 부정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둘러싸인 영역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 웨인 멀러 -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 마당에 나와 문득 뒷산을 쳐다보았습니다. 짙어진 하늘 곳곳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과 둥근 달, 그리고 그들과 어우러진 조령산은 참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산의 밤공기와 풍경은 시각을 맑게 정제해주고 교정해주며 그 곳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정도로 매력적인 비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산에 혼자 올라 보려는 것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뭅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분명 아름답고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홀로 성큼 들어서기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기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인데 오르려할 때 두려움이 생기는 까닭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라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입니다. 산에 올라 자칫 산짐승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 발을 헛디뎌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산에 오르는 두려움이 분명 이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경험이 없다는 구차한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용기를 내볼 껄 하면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웠을때 느끼는 해방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자 하는 그 때의 기쁨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비움으로 가능한 것들을 헤아려 볼 수는 있어도 정작 비우지는 못합니다. 이는 늘 채우려고만 발버둥치는 우리 삶의 구조로 인함이며, 채움으로만 만족해 왔던 과거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됨 속에 살며 그릇됨을 방편으로 삼아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주어지는 한시적 기쁨과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한정적 만족감, 이는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른 가능성에로의 열린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것이 수학을 모두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수세계의 다양함을 보고 싶은 이들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신비속에 들어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막연한 것임을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막연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으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모시고자 내딛는 첫 발은 불편한 우리의 믿음이 공고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막연하다’는 것은 도리어 ‘가능성’이며,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200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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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거기
사실 우리가 죽은 ‘후’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공간상의 사후세계를 알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후세계를 알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부터 죽음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게 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죽기 ‘전’에 진정으로 살 것이냐이다. - 모리스 젱델 -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갔습니다. 이때껏 절이나 무당을 찾아 가서 불공을 드린 것이 유일한 종교적 문화 체험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나도 낯선 교회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교회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되면서, 즉 교회에 다니는 맛을 알게 되면서 방과 후에는 매일 교회에 나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 되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던 당시를 회상해보면, 너무 지나치리만큼 교회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곤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뜨거운 체험, 그 순간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입니다. 그 후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제일 행복했었기에 거리에 붙여있던 벽보를 보고 당시 인천에서 행해진 집회란 집회는 거의 죄다 참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성령체험을 하면서 곧바로 제 머리에 주입되었던 것이 [종말론]이었습니다.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고, 그것을 대비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대학 3학년이었던 1992년 10월26일,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다미선교회를 고교시절 미리 접했더라면 어쩌면 저도 거기에 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마만큼 학창시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전도에 열심을 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 3년 내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집회에 참석했던 것일 정도니까요. 당시 고교생이었던 저는 인천, 서울, 대전, 부산, 평택, 수원 등등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날이 곧 다가온다는 이 무시무시한 말을 무기로 삼아 귀찮게 굴지 말라며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던 부산의 어떤 뱃사람 앞에서도 그다지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가 생생합니다. 벌써 15년이 훨씬 지난 그 때이지만 그 때 제 가슴에 품었던 비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고교시절의 추억입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이 종말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여타의 다른 교리나 신학 장르 중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구원론 등등의 중요한 신학적 진술들과 더불어 읽혀질 때 비로서 종말론은 올바른 꼴로 신앙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교시절의 제 모습이 때론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론 부끄럽기도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당시 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행한 설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으면서도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만 골라서 편식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오시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종말이 지연되면서 의견이 분분하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내가 전에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각각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십시오”[살전4:11]라고 권면하면서,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바탕이요 으뜸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윗 글에서 모리스 젱델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오해할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생활이 훗날 우리가 기약하는 그 세상에서의 삶과 이질적이라면, 훗날의 기약은 도리어 현실 생활을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현실의 시/공과 공감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나누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 [이 자리에서] / [거기 있는 존재Da-Sein]로서 온당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꽃에서 우주를 보고, 모래알 속에서 영원을 보는 눈은 시인 블래이크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맛볼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심판과 구원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동일한 메시지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9>
사실 우리가 죽은 ‘후’ 어디로 가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공간상의 사후세계를 알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후세계를 알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부터 죽음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게 될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죽기 ‘전’에 진정으로 살 것이냐이다. - 모리스 젱델 -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갔습니다. 이때껏 절이나 무당을 찾아 가서 불공을 드린 것이 유일한 종교적 문화 체험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나도 낯선 교회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교회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되면서, 즉 교회에 다니는 맛을 알게 되면서 방과 후에는 매일 교회에 나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 되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던 당시를 회상해보면, 너무 지나치리만큼 교회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곤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뜨거운 체험, 그 순간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입니다. 그 후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제일 행복했었기에 거리에 붙여있던 벽보를 보고 당시 인천에서 행해진 집회란 집회는 거의 죄다 참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성령체험을 하면서 곧바로 제 머리에 주입되었던 것이 [종말론]이었습니다.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고, 그것을 대비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대학 3학년이었던 1992년 10월26일,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다미선교회를 고교시절 미리 접했더라면 어쩌면 저도 거기에 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마만큼 학창시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렇게 전도에 열심을 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 3년 내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집회에 참석했던 것일 정도니까요. 당시 고교생이었던 저는 인천, 서울, 대전, 부산, 평택, 수원 등등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지금 당장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날이 곧 다가온다는 이 무시무시한 말을 무기로 삼아 귀찮게 굴지 말라며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던 부산의 어떤 뱃사람 앞에서도 그다지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때가 생생합니다. 벌써 15년이 훨씬 지난 그 때이지만 그 때 제 가슴에 품었던 비전이 어떤 것인지 아직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고교시절의 추억입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이 종말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여타의 다른 교리나 신학 장르 중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구원론 등등의 중요한 신학적 진술들과 더불어 읽혀질 때 비로서 종말론은 올바른 꼴로 신앙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교시절의 제 모습이 때론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론 부끄럽기도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당시 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행한 설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으면서도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만 골라서 편식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오시리라 말씀하신 주님의 종말이 지연되면서 의견이 분분하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내가 전에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각각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십시오”[살전4:11]라고 권면하면서,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바탕이요 으뜸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윗 글에서 모리스 젱델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오해할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 생활이 훗날 우리가 기약하는 그 세상에서의 삶과 이질적이라면, 훗날의 기약은 도리어 현실 생활을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현실의 시/공과 공감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나누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 [이 자리에서] / [거기 있는 존재Da-Sein]로서 온당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꽃에서 우주를 보고, 모래알 속에서 영원을 보는 눈은 시인 블래이크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맛볼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심판과 구원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동일한 메시지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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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散漫과 침잠沈潛
마르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산만한 호기심도 끊임없이 지껄이는 원인 중에 하나이다. 하이덱거는 산만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그와 참으로 함께 있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산만한 호기심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어느 한 곳에 차분하게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이리저리 부산하게 왔다갔다한다. 산만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항상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서는데 이 경우에도 찾은 새로운 것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오직 또 다른 종류의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새로운 것을 찾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진리 하나를 알아 내려고 애쓰는 경우에도 알아낸 진리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음미하고 침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심을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옮기기 위해서 이다. 그는 어느 하나에도 제대로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 안셀름 그륀 -
끊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를 피치 못해 접하고 살아야 하는 요즈음, 10년전 번역 출간된 책 반 퍼슨의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Cultuur in Stroomversnelling를 떠올려 봅니다. 반퍼슨에 의하면 인류는 신화적 단계, 존재적 단계, 그리고 기능적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각각의 단계는 장점과 단점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데, 오늘날의 사회 문화를 그는 ‘기능적 단계’로 명명하며, 이 문화의 부정적인 힘을 조작주의operationalism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상호관계를 마치 장기판의 말이나 카드 놀이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처리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조작주의는 인간을 거대한 기계속에 맞춰진 나사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반퍼슨의 지적은 근대 300년의 변화보다 근래 30년의 변화가 더 빠르며, 근래 30년의 변화보다 최근 3년의 변화가 더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 [인간]과 [시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요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을 놓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화두가 되어 틈새 시간을 이용하고, 새벽형 인간이 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은 그마만큼 인간 사회의 구성이 급속도로 치열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틈새 시간과 새벽형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다기 보다는 그런 인간형이 되어서 성취하고자 하는 내용이란 것이 본래적 인간의 모습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알뜰살뜰한 시간 탐색과 더불어 더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접하며 살고 있는 시대와 문화의 본질을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의 본질을 면밀히 검토하고 이해하여, 그것에 흔들리거나 맹목적으로 추종, 혹은 거부하는 삶이 아니라 그것들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조금씩 변혁해 나가는 힘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덱거의 지적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산만散漫할 것인가 아니면 침잠沈潛해 볼 것인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화되고 있는 오늘 날 교회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다양하고 새로운 것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말하고 싶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산만하고, 저급하다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여기 저기 자칫 산만해 보이는 여행을 다니시며 공생애를 다 보내신 예수님도 침잠의 때를 놓치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과 침묵 사이의 조율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겠습니다.<200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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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각과 상상력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상징적 표상들을 선택하고자 하셨을 때 비둘기와 어린양 두 가지를 택하셨는데 그 둘은 결국 하나닙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활기, 부드러움, 생동력을 나타내고 어린양은 거룩한 희생물이신 그리스도의 온유, 보잘 것 없음, 겸손을 상징합니다. 자신을 술수에 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로 사자나 그와 유사한 동물을 택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리석게도 무분별한 폭력이 이 땅을 좀더 빨리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을 그런 식으로 정복하려 하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격 깃발들 위에 수놓은 사자나 호랑이나 뱀에 대해 똑같은 지향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또 다른 사자, 호랑이, 뱀들이 맞서게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전투가 벌어진 날 저녁, 폭력을 앞세운 양쪽 진영이 피로 물든 호숫가에서, 무수히 파괴된 산 속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심한 상처들을 싸매고 나면 잠시 그 크나큰 두려움을 잊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깃발들 위의 사자를 더 포악한 일그러진 얼굴로 장식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좋은 기회가 와서 우리 편이 승리하여 진짜 영원한 우리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이 위험한 놀이가 ‘미쳤다. 모두가 미쳤다’라는 한 마디로 밖에는 정당화될 수 없는 무의미한 놀이가 아닙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게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땅을 온유함으로 차지해야 합니다. - 까를로 까레또 -
우리 마음의 폭력성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이는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무의식이 외적 조건과 결탁하는 순간 저절로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는 자비와 평화, 그리고 용서가 있고, 또한 누구나 마음 속에는 증오와 전쟁과 복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획일적이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상처를 받을 수도, 또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자기-통제적 인간으로, 또한 자기-결단적 인간으로서 우리는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항해하는 가운데 단순한 매뉴얼에 매여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이우려 달려드는 세찬 파도에 맞설 수 있는 영적 자생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고귀한 가치들은 잠재워 두고 자신의 외적 욕심에 부합하는 내면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섣부른 가치를 외적 세계속에 풀어 놓고자 하는 나머지, 그것이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을 예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면서 양쪽 진영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아!”하셨던 주님의 마음, 그것은 맹목적인 선의로 무장하여 만족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즘생스런 자신의 폭압성을 처연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이 온유한 사람들입니다.<200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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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명성
우리 본바탕이 문제다. 그것을 피어내야 한다. 생명은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피血다. 같은 생명이 피기에 따라 잎이 되고, 꽃이 되고, 동물이 되고, 사람이 되고, 노래, 춤, 학문, 영이 된다. 사람의 생명은 그 됨이 과일과 같다. 겉에 아름다운 과피果皮가 있고, 그 다음 맛있는 과육果肉이 있고 맨 속에 씨가 있다. 껍질이 곱지만 그것은 눈을 끌자는 것뿐이지, 먹을 때는 벗겨 버린다. 그러나 맛있는 살을 다 먹혀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것은 본래 주잔 것이다. 먹는 놈 저는 도둑질로 알고 먹었지만 씨 편에서 보면 먹히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그 씨를 땅에 던져 줌을 얻기 위하여다. 아무리 잘 먹으도 씨는 못 먹는다. 씨는 도둑질 못한다. 도둑질할 필요 없이 도둑질하려도 할 수 없는 것이 씨다. - 함 석 헌 -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통털어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각양 모양새로 변화무쌍하며 현실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힘이됩니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대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의 가장 민감하고도 중요한 부분에 그 나라의 국민 정신은 그대로 발현됩니다. 이미 발현된 정신은 인간의 사밀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또 다시 인간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과도 같이 인간의 정신은 지난한 세월을 뒤로하고 이로써 차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세계를 맑게하는 것은 비록 척박한 일상이라 하더라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신세계가 흐려진다면 세상도 어두워 집니다. 깨어 있는 정신이 적으면 적을수록 세상은 더욱 더 잠자고만 있을 것입니다. 정신과 세상의 문제는 모종의 신비적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피부로 맞대어 느끼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피어나는 생명은 스스로 내어 주는 생명입니다. 스스로 내어줌으로 해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맺는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고, 그분의 영광이 찬연한 이유 입니다. 특별히 인간에게 있어 생명의 기반은 피血이기에, 흐르지 않고, 뜨겁지 않은 피는 생명의 진위에 의심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을 찬미한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해 집니다. 그분의 보혈은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그 피가 우리에게 전이됨으로써 우리도 그분 생명을 닮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 속에 피가 움직여 마음이고 생각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생각, 곧 정신은 그분을 닮아 가기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줄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할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4>
우리 본바탕이 문제다. 그것을 피어내야 한다. 생명은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피血다. 같은 생명이 피기에 따라 잎이 되고, 꽃이 되고, 동물이 되고, 사람이 되고, 노래, 춤, 학문, 영이 된다. 사람의 생명은 그 됨이 과일과 같다. 겉에 아름다운 과피果皮가 있고, 그 다음 맛있는 과육果肉이 있고 맨 속에 씨가 있다. 껍질이 곱지만 그것은 눈을 끌자는 것뿐이지, 먹을 때는 벗겨 버린다. 그러나 맛있는 살을 다 먹혀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것은 본래 주잔 것이다. 먹는 놈 저는 도둑질로 알고 먹었지만 씨 편에서 보면 먹히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그 씨를 땅에 던져 줌을 얻기 위하여다. 아무리 잘 먹으도 씨는 못 먹는다. 씨는 도둑질 못한다. 도둑질할 필요 없이 도둑질하려도 할 수 없는 것이 씨다. - 함 석 헌 -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통털어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각양 모양새로 변화무쌍하며 현실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힘이됩니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대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의 가장 민감하고도 중요한 부분에 그 나라의 국민 정신은 그대로 발현됩니다. 이미 발현된 정신은 인간의 사밀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또 다시 인간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과도 같이 인간의 정신은 지난한 세월을 뒤로하고 이로써 차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세계를 맑게하는 것은 비록 척박한 일상이라 하더라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신세계가 흐려진다면 세상도 어두워 집니다. 깨어 있는 정신이 적으면 적을수록 세상은 더욱 더 잠자고만 있을 것입니다. 정신과 세상의 문제는 모종의 신비적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피부로 맞대어 느끼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피어나는 생명은 스스로 내어 주는 생명입니다. 스스로 내어줌으로 해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맺는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고, 그분의 영광이 찬연한 이유 입니다. 특별히 인간에게 있어 생명의 기반은 피血이기에, 흐르지 않고, 뜨겁지 않은 피는 생명의 진위에 의심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을 찬미한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해 집니다. 그분의 보혈은 막연한 환상이 아니라, 그 피가 우리에게 전이됨으로써 우리도 그분 생명을 닮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 속에 피가 움직여 마음이고 생각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생각, 곧 정신은 그분을 닮아 가기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줄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할 것임을 믿습니다. <200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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