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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2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정돈되지 않은 부분이나 불결한 부분이 없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우리의 내적 구조물은 그것을 만드신 분의 도움 없이 유지할 수 없고, 그것을 세우신 분의 보호가 먼저 있지 않고서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성적인 돌들이며 살아 있는 재료들 이기 때문에, 창조주께서 당신 손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과 같이
복구되어야 할 우리도 우리를 만드신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大 레오>
“한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한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오기전까지는 너무나도 요원한 나라였으나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 주신 그분으로 인하여 그 나라의 신비는 무지했던 많은 이들에게 선연히 드러났습니다. 성서의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찾아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그리워했고, 사람을 사랑했으며,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당신 자신도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황홀하게 맛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하지 않는 그분을 상상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은 사람 사이에 계심으로 그가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그러운 눈빛 하나로 많은 이들의 아픔과 삶을 읽으신 그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삶의 의지속에서 발현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파스칼 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성보다 의지를 다스리기를 원하신다”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명석한 생각을 우리에게 뽐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 의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조율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나를 그리워하면서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생에 가장 가치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大 레오는 인간을 ‘이성적인 돌’이며 ‘살아 있는 재료’라 했습니다. ‘이성적인 돌’ 이란 건축자의 구상과 계획을 알고, 그의 손위에 올라 서도록 ‘준비하는 돌’ 이란 말로 읽혀집니다. ‘살아 있는 재료’ 란 집터에 들어와 사는 이들을 해하지 않고, 늘 신선하고도 맑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도록 자정自淨하는 안으로 밖으로 ‘천리향인 존재’ 라고 읽혀집니다. 건축자의 탁월한 선택, 그리고 그와 더불어 눈빛과 가슴빛으로 교감하는 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입니다.
■■■■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베드로전서 2장3-5절]
■■■■
<2004.03.11>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정돈되지 않은 부분이나 불결한 부분이 없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우리의 내적 구조물은 그것을 만드신 분의 도움 없이 유지할 수 없고, 그것을 세우신 분의 보호가 먼저 있지 않고서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성적인 돌들이며 살아 있는 재료들 이기 때문에, 창조주께서 당신 손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과 같이
복구되어야 할 우리도 우리를 만드신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大 레오>
“한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한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오기전까지는 너무나도 요원한 나라였으나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 주신 그분으로 인하여 그 나라의 신비는 무지했던 많은 이들에게 선연히 드러났습니다. 성서의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찾아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그리워했고, 사람을 사랑했으며,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당신 자신도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황홀하게 맛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하지 않는 그분을 상상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은 사람 사이에 계심으로 그가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그러운 눈빛 하나로 많은 이들의 아픔과 삶을 읽으신 그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삶의 의지속에서 발현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파스칼 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성보다 의지를 다스리기를 원하신다”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명석한 생각을 우리에게 뽐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 의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조율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나를 그리워하면서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생에 가장 가치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大 레오는 인간을 ‘이성적인 돌’이며 ‘살아 있는 재료’라 했습니다. ‘이성적인 돌’ 이란 건축자의 구상과 계획을 알고, 그의 손위에 올라 서도록 ‘준비하는 돌’ 이란 말로 읽혀집니다. ‘살아 있는 재료’ 란 집터에 들어와 사는 이들을 해하지 않고, 늘 신선하고도 맑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도록 자정自淨하는 안으로 밖으로 ‘천리향인 존재’ 라고 읽혀집니다. 건축자의 탁월한 선택, 그리고 그와 더불어 눈빛과 가슴빛으로 교감하는 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입니다.
■■■■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선택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베드로전서 2장3-5절]
■■■■
<200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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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1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해 보십시오
영혼의 순결과 마음의 거울을 가리는 모든 것을 주의깊게 벗겨 내야 하며, 그 광채를 되찾기 위해서 더 깨끗해져야 합니다. 각자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엄한 심판대에서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문해 보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의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는지, 자기 안에 어떤 육적 원욕이 영적 원의를 거슬러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천한 것을 경멸하고 높은 지위를 탐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정한 이득을 얻고서 즐거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산을 과도하게 늘리고서 기뻐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의 행복에 시기심을 불태우거나 다른 이의 불행을 좋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大 레오>
폭설로 며칠동안 바깥 출입을 못하던 차에 오랜만에 대형할인 매장에 갔습니다. 아내가 미리 적어두었던 목록대로 물건을 사고 아이들과 함께 계산대로 가던 길에 장난감 코너가 눈에 들어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새라 아이들은 바쁜 걸음으로 그리로 향합니다. 한참을 둘러보며 이것 저것 만지는데, 둘째 찬이가 사달라고 졸라대는 장난감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렇게 써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을 물리치는 *** 레인저”
찬이는 얼마전 TV에서 한창 방영되었던 ‘파워포스 레인저’라는 프로그램 탓에 색깔이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가면을 쓰고 있는 캐릭터는 죄다 동일시의 대상어서 앞으로 양주먹을 차레로 내지르며 이내 구매욕을 터뜨리곤 합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얼러보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여 겨우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을 내려 놓게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상자 겉에 써있던 케치 프레이즈가 마음에 걸립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 미래 전사에 걸맞는 맞상대를 설정하려다 보니 외계인이었을 것이고, 지구를 지킨다는 준법적인 명분을 찾다보니 ‘환경파괴’라는 화두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문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환경 파괴의 주범을 외계인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려는 장사속이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속된 습성이 뭍어 있는 것는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을거라 했나요. 무릉도원에 사람 손이 닿으면 한달도 채못가 더 이상 이름값을 하지 못할 것이라지요. 지구 자원 남용과 환경파괴 최대의 주범인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도 모자라 화성에서 약탈해 올 천연가스로 떼돈을 벌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지요. 그 뉴스를 보았을때는 정말이지, 화성에 외계인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만약 화성인이 그 별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그네들은 그들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그랬듯이 가만놔두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런데 지금껏 인간의 상상력은 외계인이 침략해 온다 하였습니다. 정작 우리들이 책임져야할 죄악된 모습을 외계인에게 둘러 씌우고, 마치 우리들이 피해자인양 의로운 사람인양 장난감에도 새겨 놓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신성한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린다.“ [오렘 리온스 / 인디언 오논다가 족]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면의 평화가 있다하면서도 다른 존재자의 신음에 무감각한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닙니다. 나의 책임이며 나의 죄인 것을 타인이게 전과시키는 모습이라면 그 순간 그리스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책임조차도 당신 것인양 지고 가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 마음의 기쁨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이어든, 그 기쁨은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이며, 풀잎소리에, 풀잎바람에 귀를 대고 우주를 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일 것입니다.
■■■■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도 같은 짓을 하면서 남이 그런 짓을 한다고 심판하는 자가 있는데,
그런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것 같습니까?
[로마서 2장 1-3절]
■■■■
<2004.03.10>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해 보십시오
영혼의 순결과 마음의 거울을 가리는 모든 것을 주의깊게 벗겨 내야 하며, 그 광채를 되찾기 위해서 더 깨끗해져야 합니다. 각자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엄한 심판대에서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문해 보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의 내면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는지, 자기 안에 어떤 육적 원욕이 영적 원의를 거슬러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천한 것을 경멸하고 높은 지위를 탐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정한 이득을 얻고서 즐거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산을 과도하게 늘리고서 기뻐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의 행복에 시기심을 불태우거나 다른 이의 불행을 좋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大 레오>
폭설로 며칠동안 바깥 출입을 못하던 차에 오랜만에 대형할인 매장에 갔습니다. 아내가 미리 적어두었던 목록대로 물건을 사고 아이들과 함께 계산대로 가던 길에 장난감 코너가 눈에 들어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새라 아이들은 바쁜 걸음으로 그리로 향합니다. 한참을 둘러보며 이것 저것 만지는데, 둘째 찬이가 사달라고 졸라대는 장난감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렇게 써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을 물리치는 *** 레인저”
찬이는 얼마전 TV에서 한창 방영되었던 ‘파워포스 레인저’라는 프로그램 탓에 색깔이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가면을 쓰고 있는 캐릭터는 죄다 동일시의 대상어서 앞으로 양주먹을 차레로 내지르며 이내 구매욕을 터뜨리곤 합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얼러보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여 겨우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을 내려 놓게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상자 겉에 써있던 케치 프레이즈가 마음에 걸립니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러 오는 외계인.....” 미래 전사에 걸맞는 맞상대를 설정하려다 보니 외계인이었을 것이고, 지구를 지킨다는 준법적인 명분을 찾다보니 ‘환경파괴’라는 화두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문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환경 파괴의 주범을 외계인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려는 장사속이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속에 자리하고 있는 속된 습성이 뭍어 있는 것는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을거라 했나요. 무릉도원에 사람 손이 닿으면 한달도 채못가 더 이상 이름값을 하지 못할 것이라지요. 지구 자원 남용과 환경파괴 최대의 주범인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도 모자라 화성에서 약탈해 올 천연가스로 떼돈을 벌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지요. 그 뉴스를 보았을때는 정말이지, 화성에 외계인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만약 화성인이 그 별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그네들은 그들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그랬듯이 가만놔두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런데 지금껏 인간의 상상력은 외계인이 침략해 온다 하였습니다. 정작 우리들이 책임져야할 죄악된 모습을 외계인에게 둘러 씌우고, 마치 우리들이 피해자인양 의로운 사람인양 장난감에도 새겨 놓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신성한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린다.“ [오렘 리온스 / 인디언 오논다가 족]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면의 평화가 있다하면서도 다른 존재자의 신음에 무감각한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닙니다. 나의 책임이며 나의 죄인 것을 타인이게 전과시키는 모습이라면 그 순간 그리스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책임조차도 당신 것인양 지고 가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 마음의 기쁨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이어든, 그 기쁨은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이며, 풀잎소리에, 풀잎바람에 귀를 대고 우주를 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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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도 같은 짓을 하면서 남이 그런 짓을 한다고 심판하는 자가 있는데,
그런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것 같습니까?
[로마서 2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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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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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10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이 세상에서 궁핍하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만물의 주님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할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하는 이들은 선행을 할 재물이 없을까봐 절대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저 과부는 동전 두 닢으로 그의 신앙심이 칭송받았으며, 흔쾌한 적선은 냉수 한 잔으로도 그 상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실 경건한 이들의 선함은 사랑에 따라 그 진정한 크기가 정해지며,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습니다. <大 레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빈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처음 지적한 알렉산더의 클레멘트 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것과 관련해 가난해지는 것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반면 욕심에 끌려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잘못이다“
클레멘트의 시대와 오늘날의 사회구조는 비교할 수 없을 많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재물을 모으고 쓰는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질을 모으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과 인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필터링 작업에 속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자가 되기까지의 수없이 많은 부정과 부패가 문제이며, 또한 부자이면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초대교부 요한 크리소스톰 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눅16:19-31)에서 부자가 그의 소유를 나누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는다”는 大 레오의 말은 우리에게 ‘자기부정’ 과 더불어 ‘자기충족’ 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담백하고도 번득이는 혜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사실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다른 무엇이 꿰차고 앉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말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심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뻣세고 우둔한 우리에게 오셔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함께 공감하시고, 함께 울웃으시고 함께 식탁의 축제를 벌여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연민이나 값싼 동정심이 아니었으며, 서슴없이 제자로, 형제로, 친구로 불러주신 자비로운 우주의 울림 이었던 것입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선을 그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부와 가난에의 ‘인식’을 스스로 조회해볼 뿐입니다. 나를 비워 주시고, 나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버려왔고 무엇을 채워왔는지를, 내 안에 자비심을 늘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하나님 자비심에 비추어 돌아봐야겠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11-12절]
■■■■
<2004.03.09>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이 세상에서 궁핍하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만물의 주님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할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하는 이들은 선행을 할 재물이 없을까봐 절대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저 과부는 동전 두 닢으로 그의 신앙심이 칭송받았으며, 흔쾌한 적선은 냉수 한 잔으로도 그 상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실 경건한 이들의 선함은 사랑에 따라 그 진정한 크기가 정해지며,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습니다. <大 레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빈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처음 지적한 알렉산더의 클레멘트 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것과 관련해 가난해지는 것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반면 욕심에 끌려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잘못이다“
클레멘트의 시대와 오늘날의 사회구조는 비교할 수 없을 많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재물을 모으고 쓰는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질을 모으고 사용하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과 인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필터링 작업에 속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자가 되기까지의 수없이 많은 부정과 부패가 문제이며, 또한 부자이면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초대교부 요한 크리소스톰 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눅16:19-31)에서 부자가 그의 소유를 나누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늘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선 행위를 할 힘을 잃지 않는다”는 大 레오의 말은 우리에게 ‘자기부정’ 과 더불어 ‘자기충족’ 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담백하고도 번득이는 혜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사실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다른 무엇이 꿰차고 앉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말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심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뻣세고 우둔한 우리에게 오셔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함께 공감하시고, 함께 울웃으시고 함께 식탁의 축제를 벌여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연민이나 값싼 동정심이 아니었으며, 서슴없이 제자로, 형제로, 친구로 불러주신 자비로운 우주의 울림 이었던 것입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선을 그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부와 가난에의 ‘인식’을 스스로 조회해볼 뿐입니다. 나를 비워 주시고, 나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버려왔고 무엇을 채워왔는지를, 내 안에 자비심을 늘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하나님 자비심에 비추어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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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1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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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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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9
자기 자신의 거룩성
이때는 온순과 인내와 평화와 평온함의 때입니다. 이때에 모든 악습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오래 지속될 덕들을 닦도록 해야합니다. 지금은 경건하고 용감한 영혼들이 다들 이들의 잘못들을 용서해 주고, 받은 능욕을 새겨두지 않으며, 모욕을 잊는 습관을 쌓을 때입니다. 지금은 충실한 영혼이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가지고 자신을 단련할 때입니다. 그래서 ‘영예를 얻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악평을 받거나 호평을 받거나’(고후6:7-8) 언제든지 평온한 양심과 항구한 성실성으로 칭찬에 들뜨지 말고 모욕에 의기소침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신앙심 있는 사람들의 단정한 태도는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모습 입니다. <大 레오>
자기중심적 삶self-centrism 은 자아에의 욕구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욕구는 바로 이 자기 중심적 삶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지극히 건강한 모습입니다. 완전한 이타적 삶은 건너뛸 수 없는 완전한 자기중심적 삶의 다음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반성적 삶self-reflection 은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출발됩니다. 이는 다른 존재자들의 방식을 존중하며 상생적 가치를 도모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인식의 선로가 ‘나’에게로 향한 것은 자기중심적 삶과 동일하나, 이는 회귀적 구조로서 나로 향한 인식은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을 향하여 언제나 관계성 안에서의 조화를 꿈꾸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두가지 삶의 방식은 자기 정체성self-identity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동화同化되는 순간은 그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스스로 긍적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당한 정체성에 기인한 이러한 자기 인식은 참으로 건강하고도 신신한 맛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자기중심적 삶 은 ‘자아에의 욕구’가 왜곡되어 편협하고도 좁다란 인식의 방향이 오직 ‘나’에게로만 향한 나머지
나 이외의 존재자들에 대한 시선 확장은 의심과 대상화로 일관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만의 안위와 편리만을 추구하는 왜소한 인간성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 뿐입니다. 또한 공허한 자기반성적 삶 은 자기 확신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모습으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땅속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한숨쉬는 나머지 거울을 닦다 거울을 깨버리는 무지한 미성숙에로 남게되고 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데데한 평가만 내리는 사람은 그 기운이 얇고 흐려 초췌한 정신으로 배리背理할 뿐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겠다는 것緣木求魚은 와신상담과 다르며,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살신성인하는 사람에 비할 수 없습니다. 大 레오가 제시한것처럼 쉽게 들뜨거나 상처받아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는 것은 순전한 자아정체성을 발판삼아 서서 고른 호흡이 가능할 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지음 받은 많은 뜻 가운데 으뜸은 우리 안에 작은 우주를 지으시고 이치를 세워주신 그분의 뜻을 높이 받들어 그릇되거나 공허하지 않는 참 나를 이루며 사는 것 입니다. 그것이 大 레오가 말한 거룩한 삶임을 믿습니다.
■■■■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여러분은 부지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할 것이며
마침내는 그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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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자기 자신의 거룩성
이때는 온순과 인내와 평화와 평온함의 때입니다. 이때에 모든 악습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오래 지속될 덕들을 닦도록 해야합니다. 지금은 경건하고 용감한 영혼들이 다들 이들의 잘못들을 용서해 주고, 받은 능욕을 새겨두지 않으며, 모욕을 잊는 습관을 쌓을 때입니다. 지금은 충실한 영혼이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가지고 자신을 단련할 때입니다. 그래서 ‘영예를 얻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악평을 받거나 호평을 받거나’(고후6:7-8) 언제든지 평온한 양심과 항구한 성실성으로 칭찬에 들뜨지 말고 모욕에 의기소침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신앙심 있는 사람들의 단정한 태도는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모습 입니다. <大 레오>
자기중심적 삶self-centrism 은 자아에의 욕구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욕구는 바로 이 자기 중심적 삶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지극히 건강한 모습입니다. 완전한 이타적 삶은 건너뛸 수 없는 완전한 자기중심적 삶의 다음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반성적 삶self-reflection 은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출발됩니다. 이는 다른 존재자들의 방식을 존중하며 상생적 가치를 도모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인식의 선로가 ‘나’에게로 향한 것은 자기중심적 삶과 동일하나, 이는 회귀적 구조로서 나로 향한 인식은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을 향하여 언제나 관계성 안에서의 조화를 꿈꾸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두가지 삶의 방식은 자기 정체성self-identity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동화同化되는 순간은 그 어떤 모습보다도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스스로 긍적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당한 정체성에 기인한 이러한 자기 인식은 참으로 건강하고도 신신한 맛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자기중심적 삶 은 ‘자아에의 욕구’가 왜곡되어 편협하고도 좁다란 인식의 방향이 오직 ‘나’에게로만 향한 나머지
나 이외의 존재자들에 대한 시선 확장은 의심과 대상화로 일관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만의 안위와 편리만을 추구하는 왜소한 인간성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 뿐입니다. 또한 공허한 자기반성적 삶 은 자기 확신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모습으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땅속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한숨쉬는 나머지 거울을 닦다 거울을 깨버리는 무지한 미성숙에로 남게되고 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데데한 평가만 내리는 사람은 그 기운이 얇고 흐려 초췌한 정신으로 배리背理할 뿐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겠다는 것緣木求魚은 와신상담과 다르며,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살신성인하는 사람에 비할 수 없습니다. 大 레오가 제시한것처럼 쉽게 들뜨거나 상처받아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는 것은 순전한 자아정체성을 발판삼아 서서 고른 호흡이 가능할 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지음 받은 많은 뜻 가운데 으뜸은 우리 안에 작은 우주를 지으시고 이치를 세워주신 그분의 뜻을 높이 받들어 그릇되거나 공허하지 않는 참 나를 이루며 사는 것 입니다. 그것이 大 레오가 말한 거룩한 삶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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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여러분은 부지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할 것이며
마침내는 그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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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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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8
세상속 이 길에서
사실 어떠한 현혹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어떠한 원욕에도 전혀 자극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온통 유혹들로 가득 차 있는 현세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죄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복된 사도 요한이, “우리가 죄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같이 그런 생각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大 레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선하게 지음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지난한 과정에 있어 예기치 못한 죄악의 모습을 닮아가곤 합니다. 이는 바울 사도의 고백에서처럼, 우리 안에 원치 않는 마음이 스며들어 사로잡아 허수아비 팔에 앉아 있는 참새마냥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사밀한 구석까지도 내버려 두지 않으며, 비교 우위를 점령하기 위한 손짓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세속에서 떠나 고독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던 것은 속세를 떠난 한적한 곳에서 규율과 수행의 시간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품기를 꿈꾸어 왔던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은, 그곳에도 세속의 여울은 여전하였는데, 상처와 용서가, 다툼과 화해가, 그리고 선과 악이 악어새 마냥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장된 자유함이나 완전한 선을 위한 시/공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서제가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인간이건 ‘사회성’이라는 산마루에 서서 여우바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서있는 이 산마루는 도리어 그 자체로 우리를 위해 예비된 성화聖化의 자리 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머물렀으나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셨던 것처럼, 님만 홀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가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사람이 있고, 죄가 있는 곳임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죄를 멀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도리어 자기만의 의義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유혹을 두려워하거나 애써 외면하지 않습니다. 죄가 많겠지만, 그보다 주님의 은총은 더욱더 창연蒼然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내가 ‘나’로 사는 바로 이 터에서 하나님 은총으로 햇빛촌을 이루며 사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초밤길을 걷듯 마냥 어둡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속 이 길 은 이미 주님이 걸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9-10절]
■■■■
<200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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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7
경축하기에 앞서
경축해야 할 축일이 크면 클수록 이를 경축하는 사람도 그만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축제의 날에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마음의 기쁨을 육체의 옷으로 표시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며 종교적인 태도로 여겨집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의를 더 기울여 교회 자체를 화려한 장식으로 꾸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진짜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지혜롭게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에게 구원을 주는 성례를 경축하기에 앞서 어떤 죄의 때가 자기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이중적인 마음의 주름이 자기를 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사람의 내면이 악습들로 오염되어 더렵혀져 있다면, 아무리 외적으로 잘 꾸며 말끔한 모습을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大 레오>
“현재 여성 단체의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전국에 걸쳐 ‘향락업소’는 30만 곳이 넘고, 여기서 일하는 여성은 120만명 가량으로 15-29세 여성 전체 인구의 2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2000년 10월 13일, 한겨레신문 칼럼, 김금수 ‘여자답게 살고 싶어라’에서]
저의 표현으로 ‘사회 비평계의 중견 테러리스트’인 홍세화 씨는 위의 기사를 읽고, 한국 사회를 모파상의 소설에 빗대어 ‘비곗덩어리’ 사회라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 전북 군산 대명동 ‘쉬파리골목’ 화재 현장에서 다섯 명의 매춘 여성이 감금 상태에서 도피하지 못하고 숨졌다는 보도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던 때에 씌여진 글이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하였습니다. 젊은 여성 다섯명 중 한명은 매춘을 하고 있는 사회. 대한민국의 밤 풍경은 향락없소의 불 빛과 교회의 십자가만이 지키고 있다고 했나요. 전혀 어울리지 않아야 할 이 두 불빛이 우리 사회에서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읽혀지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이루어왔던 유럽의 그것보다도 더 화려한 맘모스 교회들이 수도권에 집중해 있음에도, 이처럼 외마디 소리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한 줄의 복음도 아니었습니다. 간혹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몇 몇 훌륭한 성직자나 교회를 볼 때면 저자신이 부끄럽기도하면서 유난스런 자극을 받게되는 것은, 그 프로그램이 마치 “(못믿겠지만) 그래도 아직 이런 성직자가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모습은 없고 외양만 찬란-휘청이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빠스카와 성탄과 같은 기쁨의 날을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세상 속 저 아래 사람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나의 웃음과 화려함에 가려진 것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大 레오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읽혀집니다.
“얼굴에도 빛이 있어야지만 마음은 더구나도 빛이 나야한다”는 함석헌 선생 의 가르침처럼,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닦고創業 그것을 지키는데守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얼굴에 지는 주름이걸랑 인생의 경륜으로 기쁘게 받아두고,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마음에 진 주름을 펴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던 그들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그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12절]
■■■■
<20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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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6
우리 경험
그러므로 자비심에서 나온 행적은 우리의 기쁨이 되며, 영생을 위해 먹는 그 양식들로 우리는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경비로 식사하고 배부르게 되는 것에 기뻐합시다. 우리가 헐벗은 이들에게 필요한 의복을 주어 그들이 입게 될 그 옷들에 대해서도 기뻐합시다. 마음이 관대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적게 바치지 않을 것이며, 자비나 동정심의 정도는 재물의 분량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론 부유한 이들이 더 많이 바치고 넉넉지 못한 이들은 적게 바치겠지만, 선행을 하는 이들의 사랑이 동일하다면 그 행위의 결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大 레오>
제레미 리프킨 의 지적처럼 인간이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안정’security을 추구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은 침범 받지 않는 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금을 긋고 담을 세워 안과 밖의 경계를 분명히 해 나감으로써 만족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사유 재산을 추동력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지금껏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담벼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히려 인류는 원치 않는 불안으로 떨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마음 놓고 뛰어 놀 공간 대신에 위험천만한 도로와 주차장이 생겨나고, 가족이 붕괴되고 사람 사이의 신뢰와 유대감이 사라지며, 사회 환경은 물론이고, 전지구적 환경이 파쇄되어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무쇠낯짝으로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를 몰아세운 이들은 득의양양하고 있지만 ‘나’를 버려 ‘우리’를 살리려했던 익명의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은 빈곤의 경계 초병으로 묶여있는 대한민국의 극단적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 언명은 대책 없는 책상물림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지금의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를 잊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공동체로서 존재하며, 이로써 ‘나’의 의미는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는 또한 경계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한 공동체로 품에 안을 수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는 무척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자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 아닌 계급간의 만남class encounter,
즉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구제해 주는 그런 만남의 사회를 원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회복되어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의 말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현재 지니고 있는 조건과 상황은 서로를 공격하고 끌어 내릴 무기가 아니라 서로간의 치유를 위한 요긴한 도구입니다.
무산계급이었던 예수께서 저 혼자 ‘올라 서’ 있는 삭개오를 ‘내려오라!’ 불러주시고, 그와 함께 평등한 공동 식탁에 앉아 다순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경청해주셨던 것은 계급간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간의 치유에 있어 주님은 우리를 프론티어로 세우십니다. 마음에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내고 제2의 삭개오를 부르러 가라 하십니다. 소유를 위해 달려왔던 억센 과거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살피고서 ‘우리 경험’ 의 기쁨을 맛보라 부르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하라 하십니다.
■■■■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성경 말씀에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일이지만,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야고보서 2장1절,8-9절]
■■■■
<2004.03.04>
우리 경험
그러므로 자비심에서 나온 행적은 우리의 기쁨이 되며, 영생을 위해 먹는 그 양식들로 우리는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경비로 식사하고 배부르게 되는 것에 기뻐합시다. 우리가 헐벗은 이들에게 필요한 의복을 주어 그들이 입게 될 그 옷들에 대해서도 기뻐합시다. 마음이 관대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적게 바치지 않을 것이며, 자비나 동정심의 정도는 재물의 분량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론 부유한 이들이 더 많이 바치고 넉넉지 못한 이들은 적게 바치겠지만, 선행을 하는 이들의 사랑이 동일하다면 그 행위의 결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大 레오>
제레미 리프킨 의 지적처럼 인간이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안정’security을 추구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은 침범 받지 않는 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금을 긋고 담을 세워 안과 밖의 경계를 분명히 해 나감으로써 만족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사유 재산을 추동력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지금껏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담벼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히려 인류는 원치 않는 불안으로 떨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마음 놓고 뛰어 놀 공간 대신에 위험천만한 도로와 주차장이 생겨나고, 가족이 붕괴되고 사람 사이의 신뢰와 유대감이 사라지며, 사회 환경은 물론이고, 전지구적 환경이 파쇄되어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무쇠낯짝으로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를 몰아세운 이들은 득의양양하고 있지만 ‘나’를 버려 ‘우리’를 살리려했던 익명의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은 빈곤의 경계 초병으로 묶여있는 대한민국의 극단적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 언명은 대책 없는 책상물림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지금의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를 잊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공동체로서 존재하며, 이로써 ‘나’의 의미는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는 또한 경계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한 공동체로 품에 안을 수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는 무척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자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 아닌 계급간의 만남class encounter,
즉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구제해 주는 그런 만남의 사회를 원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회복되어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의 말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나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현재 지니고 있는 조건과 상황은 서로를 공격하고 끌어 내릴 무기가 아니라 서로간의 치유를 위한 요긴한 도구입니다.
무산계급이었던 예수께서 저 혼자 ‘올라 서’ 있는 삭개오를 ‘내려오라!’ 불러주시고, 그와 함께 평등한 공동 식탁에 앉아 다순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경청해주셨던 것은 계급간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간의 치유에 있어 주님은 우리를 프론티어로 세우십니다. 마음에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내고 제2의 삭개오를 부르러 가라 하십니다. 소유를 위해 달려왔던 억센 과거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살피고서 ‘우리 경험’ 의 기쁨을 맛보라 부르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하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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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성경 말씀에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일이지만,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야고보서 2장1절,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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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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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5 "푸근한 마음 영민한 눈빛" (0) | 2012.03.21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4 "인간의 의미에 대하여" (0) | 2012.03.21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 "금식에 관하여" (0) | 2012.03.21 |
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5
푸근한 마음 영민한 눈빛
친애하는 여러분, 호시탐탐 끊임없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원수를 무찌르는 데 열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것이 유익하지만, 매우 교활한 원수들이 아주 교묘한 미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지금에는 특히 더 정신을 차려 대비하고 있어야 하며,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합니다. <大 레오>
인도의 잠언에 보면 “악은 곧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지와 같이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악을 행한 그 자신을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수면위로 정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무탈한 것으로, 그리고 도리어 선함과 유익함의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특별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고 있는 오늘날,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열려진 여트마한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악한 기운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곤 합니다. 추운 겨울 날, 잠에 취한 사람은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이불 탓으로 돌려 뒤집어 쓰고 사지를 좁혀 계속 잠을 청하겠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이내 황소바람을 감지하고서 빈틈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틈이 좁은가 넓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의적 가장善意的 假裝 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인류의 수많은 크고 작은 약탈사에 있어서 단 한번이라도 선의적 가장을 쓰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합시다.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탈을 쓰고 행한 말로다 할 수 없는 악행들... 백인이 아닌 인종들, 여성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유태인들,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인들에 대한 침략과 학살에까지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내 욕심에 투영해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은 황소바람입니다. 大레오가 말한 ‘호시탐탐 노리는 원수’는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욕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보고서 살기등등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바리새인들처럼 ‘명분이 있고 가면을 썼으니 안심하라. 누가 뭐라 하랴!’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사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깊숙이 안착되어 있는 이러한 파편들이 얼마나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 돌이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곰삭은 마음이걸랑 갈아엎고umpflügen, 흐릿한 티끌눈을 하고 있걸랑 눈물로 흘려 푸근한 가슴 과 더불어 영민한 눈빛 으로 사순절을 살아야겠습니다.
■■■■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디모데전서 6장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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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3>
푸근한 마음 영민한 눈빛
친애하는 여러분, 호시탐탐 끊임없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원수를 무찌르는 데 열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것이 유익하지만, 매우 교활한 원수들이 아주 교묘한 미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지금에는 특히 더 정신을 차려 대비하고 있어야 하며,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합니다. <大 레오>
인도의 잠언에 보면 “악은 곧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지와 같이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악을 행한 그 자신을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수면위로 정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무탈한 것으로, 그리고 도리어 선함과 유익함의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특별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고 있는 오늘날,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고 적용하는데 있어, 열려진 여트마한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악한 기운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곤 합니다. 추운 겨울 날, 잠에 취한 사람은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이불 탓으로 돌려 뒤집어 쓰고 사지를 좁혀 계속 잠을 청하겠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이내 황소바람을 감지하고서 빈틈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틈이 좁은가 넓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선의적 가장善意的 假裝 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인류의 수많은 크고 작은 약탈사에 있어서 단 한번이라도 선의적 가장을 쓰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을 기억합시다.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탈을 쓰고 행한 말로다 할 수 없는 악행들... 백인이 아닌 인종들, 여성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유태인들,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인들에 대한 침략과 학살에까지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내 욕심에 투영해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은 황소바람입니다. 大레오가 말한 ‘호시탐탐 노리는 원수’는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욕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보고서 살기등등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바리새인들처럼 ‘명분이 있고 가면을 썼으니 안심하라. 누가 뭐라 하랴!’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사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깊숙이 안착되어 있는 이러한 파편들이 얼마나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 돌이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곰삭은 마음이걸랑 갈아엎고umpflügen, 흐릿한 티끌눈을 하고 있걸랑 눈물로 흘려 푸근한 가슴 과 더불어 영민한 눈빛 으로 사순절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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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디모데전서 6장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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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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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4
인간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이들이 지니는 진정한 의로움은 자기가 감히 완전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인생 여정에서 자기 결심을 포기하고, 전진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릴 지경에 떨어지는 위험스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大 레오>
근대성을 넘어선 오늘의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폭압적인 행태로 드러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2차 세계 대전의 경우입니다.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집단적 자아 중심성에로의 선로에 올라선 뒤로 거침없이 몰아세운 그들의 향연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생명과 존엄을 앗아갔습니다.
어제 오늘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두개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와 2002년 개봉작이었던 [피아니스트] 였습니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교차되었던 책은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겪은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인간이 의미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의미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하나됨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불도저처럼 자기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앞뒤 가리지 않고 뛰는 모습도 불완전하여 자칫 낙마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삶이겠지만, 허송세월을 보낸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쉽게 좌절하는 모습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죽음과 절망의 상황.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도라의 남편이자 조수아의 아버지 귀도는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으로 당당한 유머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Spiel Mann, 연주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처럼 공포의 순간에서도 손가락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빅터 프랭클은 제 아무리 암암적벽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예술이 있고, 유머가 있고, 정치가 있고, 종교가 있을 수 있음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소중한 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생의 의미에 게으르고 무감했던 우리의 삶으로 인하여 회개하십시오. 大레오의 말처럼 그것은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것 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 가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데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15절]
■■■■
<2004.03.02>
인간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한 이들이 지니는 진정한 의로움은 자기가 감히 완전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인생 여정에서 자기 결심을 포기하고, 전진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릴 지경에 떨어지는 위험스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大 레오>
근대성을 넘어선 오늘의 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폭압적인 행태로 드러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2차 세계 대전의 경우입니다. 왜곡된 자아 중심성은 집단적 자아 중심성에로의 선로에 올라선 뒤로 거침없이 몰아세운 그들의 향연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생명과 존엄을 앗아갔습니다.
어제 오늘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두개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와 2002년 개봉작이었던 [피아니스트] 였습니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교차되었던 책은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겪은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인간이 의미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의미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하나됨을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불도저처럼 자기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 앞뒤 가리지 않고 뛰는 모습도 불완전하여 자칫 낙마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삶이겠지만, 허송세월을 보낸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쉽게 좌절하는 모습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죽음과 절망의 상황.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도라의 남편이자 조수아의 아버지 귀도는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으로 당당한 유머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Spiel Mann, 연주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처럼 공포의 순간에서도 손가락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빅터 프랭클은 제 아무리 암암적벽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예술이 있고, 유머가 있고, 정치가 있고, 종교가 있을 수 있음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소중한 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생의 의미에 게으르고 무감했던 우리의 삶으로 인하여 회개하십시오. 大레오의 말처럼 그것은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것 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 가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데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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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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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레오의 사순절 설교 묵상-2
"금식에 관하여"
성스런 역사가 말해주듯이, 옛적에 히브리 백성과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들 때문에 블레셋인들의 가혹한 지배를 받고 있었을 때, 영혼과 육신의 힘을 회복하게 하는 단식을 함으로써 적군들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가혹하고 비참한 종살이가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먼저 악습들을 쳐 이기지 않고서는 무기를 들고 싸운들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과 음료를 절제하면서 자신들에게 참회의 엄한 벌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적들을 쳐 이기기 위해 먼저 목의 유혹을 그들 안에서 쳐 이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포악한 적군이며 가혹한 지배자들은 배부른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지배하고 있는 굶주린 히브리인들 앞에서 도망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大 레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말할 때가 있으면 침묵할 때가 있고, 함께 어울릴 때가 있으면 홀로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베른트 하인리히가 대부분의 곤충과 동물들은 동면冬眠이나 하면夏眠과 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먹이 부족에 적응하기 위한 비활동 기간을 겪는다고 말한 것처럼 먹을 때가 있으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사순절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먹지 않는 행위' 자체 보다 '먹지 못하는 마음'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금식 하는 것이 고행하는 것과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니라 기쁨과 희락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히 금식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상가喪家의 상주의 마음처럼 먹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때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겸손을 생각하는 사순절에 하는 금식은 ‘먹지 않는 행위’에는 큰 의미가 없다하더라도 그 행위자의 마음 상태를 맑게 해주며, 이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금식하는 것이 자랑이나 그 어떠한 것 때문이 아니라 트미한 속사람에서 호연한 속사람으로의 과정을 보는 시간임과 동시에 먹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도록 허락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의 영광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세속에 머물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속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세속에 초연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도약을 위한 시간입니다.
■■■■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4절)
<200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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