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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나가 나무를 심고 돌아와서 할 일은 정원과 비닐 하우스에 물을 주는 일.... 하루 종일 피곤한 몸이지만 교회 마당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 오늘 건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라서 건이를 불러 일을 함께 하는데, 교회 밖 스피커로 Gabriel's Oboe가 흘러 나오는 해거름의 때의 풍경이 정겨웠기에, 문득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잠시 촬영을..... 감사한 하루를 이렇게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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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방금 다급한 목소리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웃해 있는 집으로 가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서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고 막 치고 박고 싸움을 할 판에 걸려 온 전화였던 것입니다. 술에 취했지만 저를 알아보고는 다소 움찔한 두 사내(참으로 다행입니다. 저를 알아 보았으니 말입니다).
서로의 입장을 나열하는 말들로 다시 혼선을 빚을 무렵, 한 사내가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얘기를 듣고 달래는 동안 밖에 지나가는 차 소리에 괜히 제가 더 예민해 집니다. 누구라도 경찰을 불렀을까봐 조마조마 했던 것이지요.

한참을 달래주고 돌아와 하던 설교 준비를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문득 회개하는 맘으로 절절해 집니다. 일주일 노동에 토요일 하루는 온전히 설교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아침부터 걸려 오는 전화와 찾아 오는 사람들로 인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던 터라 그 시간의 전화 역시 약간 짜증난 채로 받았던 거였으니까요. 걸려 온 목소리와 이름을 그리고 내용을 들으면서 "또 시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과거의 그를 한눈에 훑고는 "판단"해버리는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정해 놓은 내일 설교 제목은 "Why should we repent?"였고, 그 때까지 써놓은 마지막 문장이 "So we need to know repentance begins with the recognition that life is moving in the wrong direction - no matter how long we have been doing it, no matter how many others may be doing the same thing, no matter how contented we are with our situation." 그러니까 회개에는 지금까지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란 얘기를 장황하게 써 놓구선, 걸려 온 전화의 그 목소리에다가는 "지금까지 이러구선 또?"라고 재갈을 물려 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또 나가봐야 할 시간입니다. 어찌 되었는지 간격을 두고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나의 시선과 목소리에 사랑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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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God does not hurry over things;time is his, not mine.

And I, little creature, a man, have been called to be transformed into God by sharing his life.

And what transforms me is the charity which he pours into my heart.

Love transforms me slowly into God.

But sin is stll there,

resisting this transformantion,

knowing how to,

and actually saying "no" to love.

Living in our selfishness means stopping at human limits

and preventing our transformation into Divine Love.

 

<Carlo Carretto, "Letters from the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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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Atlanta에 가기 전, 조규백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체리며 석류나무는 새싹이 돋고 있는데 제일 먼저 싹이 나고 꽃이 펴야 할 매화나무만 유독 싹이 나질 않는다고 조바심을 내었습니다. 목사님은 "농부는 기다리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라며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조언 한 마디 던져 주셨습니다.

어제 늦은 밤 도착한 탓에 바로 달려가 나무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맘을 참고 아침이 되어 들판에 나아...가 나무의 상태를 둘러보다가 옅은 초록의 빛깔을 두어 군데 두른 매화나무를 발견하였습니다.

죽어버렸으면 어떡하나 싶었던 매화나무가 연초록 빛깔의 싹을 틔웠습니다. 저 내민 초록의 고개는 그저 불쑥 내민 의미없는 몸짓이 아니라 멀고도 긴 부유의 생을 마감하고 새로이 정착하고자 다짐하는 의지의 표며, 한가지로 기도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응답하는 저 높으신 이의 은총이었습니다.

희망은 푸르른 벌판처럼 흐드러진 채 오는 게 아니라 이처럼 작은 변화와 떨림의 결과에서 의초로이 시작된다는 것을 새 삶을 정착한 매화 한 그루에게서 배웁니다.

 

 

 

 

And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식탁에 둘러 앉는 시간은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입니다. 오늘 대화에서 첫째 아들 건이가 하는 말이, "아빠, 칠학년이 한 백명 쯤 되는데요, 그 중에서 이번에 써머 스쿨을 듣지 않으면 다시 칠학년으로 유급되는 아이들이 사십 명이 넘는대요."

친한 친구 중에도 그 중에 속하는 아이가 있다고 껄끄럽게 꺼내는 말을 통해서 아이의 마음을 읽습니다. 대충은 알고 있는 현실이지만 이 정도가 될 줄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무사히 학교에 잘 다녀주는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다 싶었지만 열학한 환경 속에 아이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학부모 아닙니까?

때때로 아이를 멀리 다른 도시로 유학을 보낼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아니 가깝게는 미션... 센터가 있는 플랙스탭에 있는 학교로 보내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기도 하지만 그 때 마다 아이들이 반대를 하고 나섭니다. 이유야 가지 가지였지만, 어찌했던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 호피 땅이 서럽도록 정이 들어버린 그런 곳인 까닭이었습니다. 대견스런 아이들... 내가 저만했을 때는 어땠는가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다시금 제 스승으로 커다랗게 이 호피 마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나무에 물을 대는 관계시설 배관 작업을 하고 왔습니다. 다시 시커멓게 팔뚝이 그을려서 왔지만, 돈 한푼 받는 것도 아닌데 나를 도와 열심히 일해 준 우리 교회 폴 예스떼와 아저씨와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새신자로 처음 교회에 왔던 투박한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를 위한 기도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지금은 선교지의 일만으로도 벅찬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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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흙과 뿌리를 보듬어 줄기와 가지를 튼튼하게 하고 끝내 색색으로 올라오는 꽃과 열매를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흙과 뿌리를 침투해 들어가 본디 열매를 보려 뜻하던 식물에 해를 끼치는 것들을 잘 구분해 내어 제거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기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이 후자의 과정에 더 많은 시간과 비중을 할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생활을 한다 할 때에 무엇가를 위해 매진하고 목표로 설정한 것에만 매달리다가는 알 수 없는 때에 흩뿌려진 원치 않는 것들이 흙더미를 깊이 파고 들어 두툼한 저만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 후 이내 줄기의 밑둥을 옭아매 버리는 것을 간과하게 되곤 합니다.
하여 영적 생활이란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이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가려내는 혜안을 길러내는 것에서 시작해 결국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크게 그려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眞이라든가 善이라든가, 正이라든가 義라고 하는 것들은 과연 美를 향해 있으며, 이는 홀로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시며, 그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의 간극을 꽉 채우고 계신 분을 향한 호흡을 영적 생활이라 부르는 까닭입니다. <2012년 5월 4일, 가족과 함께 정원의 잡초를 제거한 날의 단상>

And

현실을 그저 현실로

인간 예수는 실망으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실망에 대한 반응은 교훈적입니다.
그분은 결코 불평하지 않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의기소침해져서 일을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관계의 실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때로는 애정을 갖기도 하고 도와도 주지만
때로는 실망시키리라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비록 원한다 해도 사람들이 항상 이상적으로,
혹은 완벽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 랄프 라니에리 -


예수님처럼 영민하신 분이 또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가슴 따뜻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어리숙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결같은 자비와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무지와 옹색과 배신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로 인해서 마음 아파 하시면서 홀로 기도하셨던 모습이었지요.

예수님은 분명 마음이 여린 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속내를 다 드러내 보였던 분이기도 하고, 한번은 너무 어이없는 경우를 당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셨는지
주저 앉기도 하셨습니다. 언제 그랬냐구요? 마가복음 9장35절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네요. 한번 찾아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두 번째로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어서 가버나움 집 밖에서 그들은 서로 누가 제일 큰 제자인지를 놓고 쟁론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처음에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못들으셨나 봅니다. 아니 제자들을 오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3절에서 제자들에게
"토론‘[디아로기조마이]διαλογίξομαι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디아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
하였기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디아로기조마이]와 [디아레고마이]는 무슨 차이 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디아로기조마이]는 reflection, consider를 의미합니다. 즉 반성하고, 생각해보고, 곰곰이 따져 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다시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혹 반성하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놓고 반성하고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디아레고마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speak out이나 confer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어떤 결론을 위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하는 이話者의 말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이
[자기 자신을 향해] 회개하고 반성하는 모습이기를 바랬지만,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산에서의 무지한 모습,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던 무능한 모습, 그리고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무정물無情物과도 같은 모습을 뒤로하고서 누가 큰가 하는 것을 두고 쌈박질을 하는 무쇠낯짝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들은 직후에 벌어진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은 마치 돌아가시는 부모를 앞에 두고 상속 다툼을 벌이는 것에 버금갈만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제 곧 자신에게 닥칠 일로 인해 유언과도 같은 피빛 가르침으로 애쓰셨지만 제자들은 동상이몽으로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하릴없이 주저 앉으셨지만, 다시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나쁜 선생은 있어도 나쁜 제자는 없다”는 말을 주님이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주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προτος, 프로토스]가 되려면 끝[εσχατος, 에스카토스]이 되라고 천천히, 천천히 말씀하십니다.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다시금 친절히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자신을 좌절시키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이들까지도 품에 안아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현실로 그대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현실이 주는 피치 못할 좌절감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뜻 주시고 힘 주신 하나님의 길을 따라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모든 시간성을 아우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소유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으로
그 시간성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똑똑히 보셨던 주님은 송곳눈을 하고서 달려오는 현실의 굴레로부터 참 자유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200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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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신을 증명하는 삶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철없고 부질없는 모험인가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통상적으로 이런 물음으로 골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철저히 구조화된 세상속에서 신의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제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판에 신의 존재를 구상하여 세상 구조에 대조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거꾸로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신뢰하고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소중하고도 가치롭게 여기는 그 무엇은 과연 얼마나 실증적이며 얼마나 검증된 것인가고 말입니다. 이것은 네거티브적 질문을 통해 반사논리를 얻고자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은 코웃음을 받기에 딱좋은 격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가치들이 실증적이지 못하고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존재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모호하다’거나 ‘확실하지 않다’거나 혹은 ‘미신적이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해주는 원인原因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 철저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기도 버겨운 삶은 현상 이면의 것들에 전혀 무감각해져서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모든 것이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라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고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감히 머리 둘 곳에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끄 모노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우연’에 따라 우발적으로 일아나는 현상이라면,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혈연을 비롯한 갖가지 관계성들이 단순히 우연적 발생이라면, 그 속에서 윤리를 꺼낼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 유명한 움베르또 에코가 “타자의 존재성 자체에서 윤리가 나올 수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며 심증적인 주장일뿐 그에 따른 실증적인 논거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형제나 부모에게 욕을 하든 살인을 하든 원리 원칙적으로는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사회적 합의consensus를 어겼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뿐이지 그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임의적이며 형식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의 권위를 찾기는 힘듭니다. 흔히 말하듯 ‘인륜’이니 ‘천륜’이니 하는 말은 단지 유희적 언어로, 상황이나 문장에 어울리는 조미료같은 언어로서 작용할 수는 있어도 언어의 진정성에서는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심각한 오류는 그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근거가 현실 생활에서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아기적 발달에서 정지된 인간 상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단지 경험적 근거에만 의지하여) ‘희망’이라는 단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거나, 가장 극단적인 예로는 그들이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신의 존재만큼이나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인간 가치일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감정적 주장이 앞선 경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을 갖는 것도 논리적 적합성을 따져서 신앙을 선택하기 보다는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신앙인의 길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논리적이며 이성적 비판은 그 다음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감정적으로 싫은 것에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하나 하나는 다방면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어로써 역할합니다. 이미 어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사유체계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신적인 언어로써 역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 존재는 굳이 얕은 머리로 증명해 낼 필요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비판하거나 변증한다는 것은 어느 쪽에서건 충분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언어가 되어야겠습니다. 커다란 사전 한 페이지에 장식되어, 밑줄 긋고 또 읽어볼만한 단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단어가 동사이건 명사이건 혹은 다른 것이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200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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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자식에게

천천히 씹어서
공손하게 삼켜라

봄에서 여름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비가 내렸다.
온 나라는 연록이 피어나며 생명의 기운이 뻗혀 난다.

►▷ 이 현 주 ◁◄



밥상 앞에서 투정부리는 것이 어디 우리 아이들만의 일일까요. 요사이 들어서 부쩍 투정이 느는 찬이와 건이를 보면서 오늘은 혼줄을 내주었습니다. 엄마가 정성스레 내준 밥상에 원하는 반찬이 없다는 이유였지요. 아이가 찾았던 반찬은 "콩나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콩나물을 유독 좋아했던 건이는 어딜가도 내주는 콩나물만큼은 남김없이 다 먹곤합니다만, 오늘 콩나물이 없다고 밥상 앞에서 딴짓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버럭 소리를 내면서 아니 지르면서, 일어나 나가 있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아이는 뜻밖의 제 호령에 울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예전에 김지하 선생은
"밥은 하늘이다"고 했지요. 학창시절 그분이 그 화두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핏 기억은 위에서 이현주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많이 다르지 않는 듯 합니다. 밥이 하늘이라면 우리는 하늘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 하늘은 이 땅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밥을 고맙게 먹지 못하고 그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거나 혹은 마지 못해 먹는 습관이 우리의 삶에 배어 있다면 하늘과 대지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다는 고마운 마음을 지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삼형제 중에 막내였던 저는 유독 밥투정을 했던 철부지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 제 입에 맞는 반찬을 내주시기도 하셨고, 그러면 두 형님들은 농 섞인 말로 "엄마는 막내만 좋아한다"고 말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우리 아이들이 저를 닮은 걸까요? 제 자화상을 보는 듯 건이와 찬이가 밥투정 부리는 것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이미 부모가 되버린 입장에서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늘나라를 둘레상에서부터 시작하셨던 예수님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 늦은 나이에 그것을 깨달은 저로써는 우리 가정에서 매일 나누는 밥상에서부터 하늘나라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밥상처럼 하늘나라를 맛볼 수 있는 시공時空이 또 있을까요. "~이 살아야 ~이 산다" 혹은 "~이 죽어야 ~가 산다"는 말이 유행이었지요? 그 유행에 동승해서 이런 말을 만들어 봅니다.

[밥상을 살려야 하늘나라가 산다]


이 말을 굳게 믿어봅니다. 제 밥상을 놓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나눌 길도 요원할 것이고, 나눌 길이 요원한 세상은, 드러낸 독아毒牙로 자신을 무는 꼴이 되기때문입니다. <200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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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는 맘의 나라다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하신 그 나라는 맘의 나라다. 안이란 맘이다. 맘의 나라는 없음의 나라다. 안內이란 모든 것이 다 아니否인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 가진 때가 맘이요, 그때가 왕이요, 그 맘이 온전히 왕 노릇하는 맘, 즉 제 노릇을 하는 맘이다. 무엇에 붙은 맘은 맘이 아니다. 맘이 제 노릇을 하면 그것이 평안이다. 불평은 맘대로 아니 되기 때문이요, 맘대로 아니 되는 것은 맘이 주장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주장하는 것이 있는 한, 맘 제대로는 못한다. 주장은 곧 잡힘이다. 당김이 곧 끌림이다. 맘대로는, 맘이 주장을 내버린 때에야 있다. 그것이 자유다. 무엇을 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하기 위해서이나 무엇을 하면 나는 잃어버린다.  -  함석헌 -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인식론적 공간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정교한 말이나 논증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나라이며, 다가올 나라임과 동시에 이미 시작된 나라이기도 하기에, 인식론적 제한성으로 부여잡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가 어떤 묘령의 지역에 국한된 존재론적 공간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하나님 나라를 살다간 믿음의 선친들이 있어왔듯이, 하나님 나라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어느 곳이건 상관없이 펼쳐질 수 있는 흐르는 바람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였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의 집이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리고 어떤 이들은 억류된 채로 식구통으로 밀어 넣어주는 주먹밥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맘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마음’은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은 머리이며, 마음은 가슴입니다. 생각이 다르면 가슴을 나눌 수 없지만, 가슴을 열면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그것이 나누고 섬김에 있어서 어떤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가슴을 열면 누구도 친구가 될 수 있으며, 모든 것에 마음을 열고, 푸르러질 수 있는 이들은 찬송 가사처럼 그 어디나 하늘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애써 지키려 할때 지킬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버리려할 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에 비로소 완성될 나라이기에, 버리셨던 그 맘을 닮는 이들이야 말로 참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아직 아니긴 하지만, 우리가 이미 그 나라로 만날 수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200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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